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사람 얼굴을 새긴 사슴 뼈가 발견되었다.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는 고래와 물고기 등을 새긴 조각이 발견되었다.
구석기 시대 집자리 유적에서는 기둥과 담, 불 땐 자리 등이 발견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2만 년 전의 공주 석장리 유적에서 화덕 자리가 있는 임시 주거지 흔적이 나타났다. 대전 용호동, 전남 장흥 신북 유적에서도 화덕 자리가 발견되었다.
흑요석의 출토지로 보아 후기 구석기 시대에는 이미 원거리 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기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변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그 결과 슴베찌르개와 돌날석기가 이 시기 동북 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유행할 수 있었다. 또한, 화산 지대에서만 산출되는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도 이 시기의 활발한 교류를 증명해 주고 있다.
(신석기때의 흑요석은 부산 동삼동, 일본에서 수입)
신석기 시대에 이르면 움집을 지을 때 기둥과 서까래를 사용하였다.
구석기 시대 후기의 잔석기로는 톱이나 칼로 만든 좀돌날이 있다.
미송리식 토기, 팽이형 토기, 송국리형 토기 등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민무늬 토기이다.
민무늬 토기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로 표면에 무늬가 없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역별로 토기 모양이 조금씩 다른데, 요동 지역과 청천강 이북에는 미송리형 토기, 대동강 유역에는 팽이형 토기, 한반도 중남부에는 송국리형 토기(부여 송국리)가 널리 유행하였다.
청동기 시대에는 청동 도끼를 이용하여 나무 농기구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전남 순천 대곡리에서 철기 시대 집터가 발굴되었고,
경남 창원에서는 널무덤이,
광주 광산에서는 독무덤이 출토되었다.
경남 창원에서는 널무덤이,
광주 광산에서는 독무덤이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농경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 봉산 지탑리, 옥천 대천리, 고성 문암리 등이 있다.
최근 옥천 대천리 유적에서도 탄화된 쌀, 보리, 밀, 조 등 다양한 곡물이 출토되었다.
강원 고성 문암리에서 밭의 흔적이 확인되어, 기원전 3000년경 한반도에서 원시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경남 진주 상촌리 유적이나 창녕 비봉리 유적 등을 통해 신석기 시대에 도토리가 중요한 식량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남 보령 관창리 유적(청동기)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 관개 시설을 관장할 정도의 지배층이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초기 철기 시대에는 중국제 가지창이 제작되었고, 부뚜막과 구들 시설이 나타났다.
압록강 유역의 시중 노남리 유적, 두만강 유역의 무산 호곡동 유적, 경기 화성 기안리 유적과 가평 대성 리 유적, 경북 경주 황성동 유적, 경남 창원 성산 패총 유적 등은 한반도의 철 생산 관련 유적지 이다.
반구대 바위그림에는 수상 동물과 육지 동물이 새겨져 있다. (울주, 청동기)
반구대 바위그림은 쪼기 방식과 긋기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쪼기는 바위 면을 두드려서 형상을 만든 것으로 깊 이가 얕고 간격도 넓다. 긋기는 날카롭고 단단한 도구로 여러 차례 그어서 모양을 만든 것으로 선의 깊이가 깊 고 간격도 일정하다. 긋기 방식은 쪼기 방식보다 발달한 기술로 후대에 고안되었다. 바위그림에 새겨진 동물 중에서 고래는 대부분 쪼기 방식으로 제작된 반면, 육지 동물은 대부분 쪼기와 긋기를 결합한 방식으로 제작되 었다. 이는 바위그림을 새긴 사람들이 고래를 주된 식량 자원으로 삼다가 점차 육지 동물을 사냥해 먹었음을 알려 준다. 반구대 바위그림에는 고래와 더불어 여러 사람을 실은 배, 죽은 고래를 가라앉지 않게 하는 부구, 그 물 등을 이용한 포경 장면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울주 천전리 암각화 - 바위그림에 동심원, 각종 기학 무늬 (청동기)
고령 장기리 바위그림 - 사각형 모양 (청동기)
둘다 기하학적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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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오늘날 한민족의 주류는 예(濊), 맥(貊), 한(韓) 등의 종족이다.
02 요령 지역의 돌널무덤, 덧널무덤 등에서 고조선 관련 청동 유물이 출토되었다.
03 고조선에서는 지배자가 죽으면 산 사람을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강상 무덤(중국 랴오닝 성 다롄)은 고조선 당시의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며, 총 23개의 묘광에서 140여 명의 사 람 뼈와 함께 청동기가 출토되었다. 색깔로 표시한 부분이 시신을 묻은 자리이다. 순장의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나, 가족 공동 묘로 보는 견해도 있다.
04 고조선의 정치 체제는 국왕이 자치권을 가진 족장 세력과 함께 나라를 다스린 연맹체였다.
고조선의 정치 체제는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상은 수천 호로 이루어진 지역 집단의 우두머리로서 중앙에 진출하여 국정에 참여하였다. 상 밑에는 읍락을 자치적으로 이끈 족장이 여럿 존 재하였다. 이렇듯 고조선의 정치 체제는 국왕이 자치권을 가진 족장 세력과 함께 나라를 다스린 연맹체에 가까 웠으며, 복속 지역도 주로 토착 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06 부여 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모자를 장식하기를 좋아했으나, 삼한에서는 금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07 망강루 고분군의 유물로 미루어 부여와 고구려 건국 세력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망강루 고분군에서는 이 지역의 고유한 토기와 더불어 쇠도끼, 각종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이 가운데 금줄 을 ‘8’자 모양으로 꼬아서 만든 금귀걸이는 지린 성 위수의 부여 무덤에서도 출토된 적이 있다. 이에 많은 학자 들이 망강루 무덤을 부여 방면에서 남하한 유이민이 남긴 것으로 보고,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왔 다는 건국 설화와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다.
09 고구려, 옥저, 발해에서는 온돌 유적이 출토되었다.
10 마한에서는 장사를 지내는 데 소나 말을 순장하였다.
12 동예와 삼한에서도 생산 수단으로서 농경과 목축을 중시하였다.
01 풍납토성, 오녀산성, 환도산성, 월성 등은 삼국의 도성 유적이다.
02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 여겨 황제국을 자처했다.
고구려 오회분 4호 묘 천장 벽화에는 측면의 사신도와 함께 천장에 황룡을 그려 넣어 중국 황제와 대등한 위상 을 표현하고 있다. 북위에서도 고구려를 황룡국이라 칭하고 있어 고구려의 위상이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았음 을 알 수 있다.
04 비유왕, 동성왕, 무령왕은 모두 중국 및 왜와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05 6세기 후반 위덕왕은 관산성 패전 직후의 위기를 수습하고 중국 남북조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다.
06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된다.
신라나 가야 지역에서는 순장을 한 여러 고분들이 발견되었다. 고령 지산동 44호분은 가운데에 3기의 대형 움 식 돌덧널(주곽, 부장부곽)을 안치하고 그 주위에 32기의 소형 돌덧널(순장 곽)을 배치한 후 봉토를 쌓은 무덤 이다. 이 가운데 22기에서 24개체의 순장 인골이 발견되었다
07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의 남쪽 영역은 아산만에서 영일만을 연결하는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08 금관 가야 멸망 후 가야 연맹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과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 지 역으로 분열되었다.
10 백제 성왕은 신라 왕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11 관산성 전투, 대야성 전투는 김유신 가문이 신라에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7세기에 고구려 영류왕과 백제 무왕은 신라를 공격하였다.
13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신라는 왜와 외교 관계 회복을 도모하고 옛 백제의 가림성을 공격하였다.
당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지배하며 신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신라는 이에 맞서 백제 옛 땅의 80여 성을 함락하고 가림성을 공격하였다. 671년 신라 장군 죽지가 가림성(부여)을 공 격하여 당군 5천여 명을 죽였는데, 가림성 전투 이후 나·당 전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02 신라에는 복수의 재상이 있었다.
03 경덕왕은 지방 행정 구역의 명칭과 관직명을 개정하였다.
04 최치원은 해인사 묘길상탑지를 남겼다.
최치원은 “전쟁과 흉년의 두 재앙이 동쪽에 와서 나쁜 중에 더욱 나쁘지 않은 곳이 없다. 굶어 죽고 싸우다 죽 은 시체가 들에 즐비하였다.”라고 신라 말의 상황을 합천 해인사 길상탑(경남 합천) 탑지에 기록하였다.
05 발해의 촌락을 다스리는 수령은 토착 세력으로, 일본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어 교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09 일본은 발해에 사신을 보내면서 ‘견고려사’라고 칭했다.
10 발해 지방 유력층의 다인장(多人葬) 고분은 소형 굴식 돌방 무덤으로서 고구려 유민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1 용두산 고분군에서는 ‘황상’, ‘황후’ 등의 표현이 있는 묘지석이 출토되었다.
01 삼국은 역 징발과 세금 수취를 위해 인구를 연령별 등급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단양 신라 적성비에 보이는 ‘소녀(小女), 소자(小子)’, 부여 궁남지 출토 백제 목간에 쓰인 ‘중구(中口) 4명’, ‘소구 (小口) 2명’ 등의 표현은 삼국이 인구를 연령, 성별에 따라 몇 개의 등급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02 백제에는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이 있었다.
03 백제와 신라에는 수공업을 관장하는 관청이 있었다.
05 발해 솔빈부의 말은 당에 수출한 대표적인 교역품이었다.
06 신라는 통일 직후 일본과 교류를 재개하였고, 일본은 쓰시마 섬에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한 신라 역어소 를 설치하였다.
08 일본의 쇼쇼인에는 신라에서 보낸 불경이 소장되어 있다.
09 발해는 서역과 교류하였다.
10 발해의 민간 상인들은 서경 압록부를 거쳐 신라와 교역하였다.
11 백제의 형벌은 직접 처벌인 생명형에서 점차 간접 처벌인 배상형으로 바뀌었다.
모반, 퇴군 및 살인자는 목을 베고, 도둑은 유형에 처하며 훔친 물건의 2배를 징수한다. 결혼한 부인이 간통하 면 그 신분을 박탈하고 남편 집의 종으로 삼았다. - 주서 반역자는 그 가족과 재산을 몰수하고, 살인자는 노비 3인을 제공하면 속죄되며,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 질한 자는 그 액수의 3배를 배상하고 금고형(평생 벼슬길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받는다. - 구당서
12 신라와 발해에는 부곡이라는 특수 행정 구역이 있었다.
14 대씨, 고씨, 이씨, 왕씨 등은 고구려계 발해 귀족의 성씨였다.
01 덕흥리 고분 벽화의 북두칠성을 통해 고구려의 천문학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02 오회분 4호묘 벽화에는 도교의 영향이 보인다.
03 각저총에는 곰과 호랑이의 모습, 서역인의 모습 등이 표현되어 있다.
04 고령 고아동 벽화 고분은 가야에서 불교가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05 백제 금동 대향로는 백제와 서역과의 교류를 알려 준다.
07 백제의 아좌 태자는 일본 고대 회화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쇼토쿠 태자의 화상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08 발해는 일본에 불경을 전해 주었다.
불정존승다라니경(일본 석산사 소장)에는 861년 발해국사가 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0 논어 목간을 통해 통일 신라에 유교가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 고구려의 승랑은 삼론종으로, 신라의 원광은 섭론종으로 중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우리나라에서 발달한 불교 사상은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에까지 역수출되었다. 고구려 승랑은 중국 남조의 양 에서 삼론학을 깊이 연구하여 삼론종 성립의 토대를 놓았다. 신라의 원광은 섭론종 연구로 수에서 명성을 떨 쳤고, 의상의 화엄학은 당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원효는 일심 사상으로 동아시아 불교계의 철학적 대립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그의 저술은 인도에까지 전해졌다. 유식학으로 당에서 명성을 떨친 ‘서명학파’의 시조 원측의 저 술은 티베트 대장경에 수록되었다.
고구려 승려 승랑과 백제 승려 혜균은 중국에서 삼론종을 깊이 연구하였다. 신라 승려 원측은 당에서 활약하면 서 유식 일변도의 중국 법상종을 비판하고, 유(有)와 공(空)의 조화를 중시하는 신라 법상종의 시조가 되었다.
13 함경남도 절골 유적은 발해가 고구려의 불교를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발해는 고구려 불교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주로 도성과 옛 고구려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가 발달하였다. 고구려 와 발해 문화층이 모두 확인된 함경남도 신포의 절골 유적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 준다. 여기에서 발견된 명 문 금동판은 고구려 때 탑을 세우면서 제작한 것으로, 발해 문화층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 문화 를 계승하였음을 잘 보여 준다. 금동판에 새긴 ‘천손(天孫)’이라는 표현은 고구려 왕실의 조상을 뜻한다.
14 역법으로는 백제는 원가력을, 통일 신라는 인덕력을 수용하였다.
백제는 남중국의 송으로부터 원가력을 받아들이고, 역박사를 두었다. 신라는 선덕 여왕 때에 첨성대라는 천문 대를 세웠다. 통일 신라에서는 당의 새 역법인 인덕력을 받아들이고, 누각전을 설치하여 시간을 측정하였다. 김암은 당에서 음양가법을 배워 와 천문을 담당하는 사천대박사에 임명되었다.
16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고(528),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지었다.
01 하남 교산동 마애 약사여래 좌상은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음을 보여 준다.
02 현종은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04 송이 금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 하자 고려가 거부하였다.
05 윤관은 동북 9성을 쌓은 뒤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다.
06 고려는 국초부터 해로를 통해 중국 5대 및 송과 교류하였다.
07 몽골이 침입하자 고려의 박서는 귀주성에서, 최춘명은 안북부에서 격퇴하였다.
08 고려가 원에 항복하자 원 세조는 ‘불개토풍’의 원칙을 따른 ‘세조 구제’를 약속하였다.
원 세조(쿠빌라이 칸)는 고려가 요구했던 내용을 수락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양국 관계를 제시하였다. 이때 세조가 약속한 것을 ‘세조 구제’라 한다. 첫째,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다. 둘째, 사신은 오직 원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셋째,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넷째,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다섯째,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여섯째, 몽골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09 고려는 금과 요 및 송의 치열한 경쟁 상황을 이용하여 압록강 유역의 요지인 보주(의주)를 확보하였다.
10 교정도감은 무신집권기에 인사권, 재정권, 감찰권 등을 행사하는 최고 권력 기구였다.
11 몽골 침입 때 용인 처인 부곡민, 충주 다인 철소민, 관악산 초적 등 하층민의 대몽 항전이 많았다.
01 고려는 송, 원 등과 교역하면서 은이 다량으로 유출되어 경제에 타격을 입었다.
04 통도사의 장생표를 통해 고려 사원 경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05 고려의 13개의 조창에서는 가을에 거둔 세곡을 이듬해 5월 이내에 경창으로 보내야 했다.
07 고려에서는 산전이 많이 개발되었다.
08 고려 후기에는 은 조각을 화폐처럼 사용하였으며, 원의 지폐인 보초가 유입되어 지배층에서 사용되었다.
09 고려 불화인 ‘미륵하생경변상도’에는 농민들의 농경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10 신안 해저에서 발견된 선박은 원과 일본을 오가는 교역선이었다.
01 고려는 본관제로 인해 거주지의 이전이 어려웠다.
02 개심사지 오층 석탑은 향도의 활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04 고려의 향리는 지역 방어, 사찰 건축 등의 업무까지 담당하였다.
고려 시대 군현에서는 향리가 직역을 세습하며 지역민을 이끌었다. 향리들은 조세와 공물을 거두어 중앙에 납 부하였으며, 간단한 소송을 진행하는 등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또한, 군을 통솔하여 관청, 성, 사찰 등 을 건축하였으며, 전시에는 지역을 방어하기도 하였다. 한편, 약목군(경북 칠곡군 약목면)의 향리들은 석탑을 건립하면서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해 두었는데, 이것이 ‘정도사 5층 석탑 조성 형지기(形止記)’이다.
05 고려의 상피 대상에는 외삼촌, 외사촌이 포함되었다.
상피제는 혈연에 얽매어 공적인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관련된 부서에서 같이 근무하지 못하게 하 는 제도로 아버지와 아들이 우선적으로 상피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삼촌과 외삼촌, 이모부와 고모부가 대상 이 되었다. 또한, 형제의 아들과 자매의 아들이 대상이 되고, 친사촌과 외사촌, 고종 사촌과 이종사촌이 대상이 되었다. 상피제의 마지막 적용 대상이 사촌인 것은 이 범위를 넘어가면 공적인 관계를 그르칠 만한 친족이 아 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성씨가 부계에 대한 소속 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 였다. 성씨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일 뿐 시조로부터 이어지는 혈연관계를 의식하여 부계 집단을 구성하는 요 소가 아니었다.
09 원 간섭기에는 몽골의 의복인 철릭이 유행하였다.
01 고려 말 보우와 혜근은 원으로부터 ‘간화선’을 중시한 임제종을 들여왔다.
04 팔관회는 도교, 토착 신앙, 불교가 어우러진 행사로 하늘신, 산신, 강신, 용신 등 여러 신들을 제사하며 즐 기는 축제로 전개되었다.
05 고려 예종 때 수도 개경에 복원궁, 대청관 등의 도교 사원(도관)이 건립되었다.
07 묘청은 도교의 영향으로 서경에 팔성당을 건립하였다.
08 고려 시대 평양에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섬기는 동명 신사를 두었고, 개경에서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 에게 제사를 지냈다.
09 고려 국왕들은 용의 혈통으로 신성시되어 사후에 소상이나 초상으로 제작되었으며, 사원에 안치한 후 제 사를 지냈다.
10 고려에서는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성황신을 지정하여 나라에 큰 경사가 있거나 전쟁과 같은 국가의 큰 혼 란이 있을 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1 강릉 단오제는 토착 세력인 향리가 주도하였다.
12 고려 대장경은 거란 대장경의 영향을 받았다.
14 흥국사는 만적이 노비를 모아 봉기할 것을 약속하였던 사찰로, 강감찬이 거란을 무찌른 기념으로 세운 탑이 있다.
16 고려 말에는 불화와 사경화가 유행하였는데, 화엄경보현행원품은 대표적인 사경화이다.
18 고려의 외국어 학습서인 “노걸대”에는 고려 말 고려 상인과 중국 상인의 대화가 실려 있어 육로를 통한 고려의 국제 교역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상인의 무역 활동을 주로 기술한 “노걸대”와, 일상생활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박통사”는 고려의 대표적 인 외국어 학습서로 평가 받는다.
19 치성광불여래왕림도는 고려의 천문학 수준과 동서양의 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불화이다.
20 고려에서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역법 계산법을 사용하였다.
02 조선은 근무고과평가에 따라 관리를 파직하기도 하였다.
03 조선 태조 때 김사형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04 세종이 설치한 4군은 폐지되었다가 양란 이후부터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걸쳐 복구되었다.
05 세자는 세자 책봉 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교 윤리를 익혔고, 서연을 담당한 세자시강원에서 유교 경전 과 역사서를 통해 제왕학을 공부했다.
07 조선의 국왕은 농사와 관련된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모시는 선농단에서 제사를 드리며 풍년을 기 원하고 적전을 마련하여 몸소 밭을 가는 친경을 실행하였다.
10 속오법은 명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에 나오는 군사 편제 방법으로, 명확한 지휘 편제와 연대 책임 을 강조하였다.
11 조선은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지 9년 뒤인 1607년에 회답 겸 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3 의순관은 압록강가에 있는 역관(驛館)으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14 사명당 유정은 1604년 탐적사로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하고 조선인 포로 1,500여 명 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15 안용복의 도일 활동 이후 조선은 정기적으로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여 살피도록 하는 수토 정책을 펼쳤 다.
16 소현 세자는 귀국할 때 아담 샬의 소개로 천주교 신자인 청의 환관과 궁녀를 데리고 들어왔으며, 망원 경·자명종·천구의 등 서양 물건을 가져왔다.
17 영조 말년에는 탕평책의 후원 세력으로 중용되었던 외척 세력의 힘이 강해지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18 정조는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고 광산 개발을 장려했으며, 공노비의 해방을 추진하였다.
19 순조는 안동 김씨의 전횡을 견제하고자 효명 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을 간택하였다.
20 신숙주는 성종의 명으로 “해동제국기”를 완성하였다.
21 최부는 흑산도 부근에서 표류하여 명에 다녀와 성종의 명으로 “표해록”을 작성하였다.
02 조선 시대에는 면포가 삼베, 미곡과 함께 대표적인 물품 화폐로 세금 납부에 통용되었다.
03 16세기에 장시가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전국의 장날을 통제하고 장시세를 거두고자 하였다.
04 영조 때 균역법 실시를 위해 “양역실총”을 편찬하였다.
영조 때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먼저 양역의 종류와 배정된 양인의 수를 조사하 여 “양역실총”을 편찬하였다. “양역실총”은 읍에 배정된 양역의 종류와 담당 인원수를 전국적으로 조사하여 정 리한 책으로 균역법 시행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05 현종 때 제언사가 설치되었다.
06 개간을 원하는 지주, 궁방이나 관청 지주, 작인과 떨어져 사는 지주 등은 타조보다 도조를 선호하였다.
08 고구마는 1764년에 일본에 다녀온 조엄이 가져와 널리 퍼졌고, 감자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청에 전래된 것이 다시 들어왔다.
10 전문 수공업자들은 점촌을 형성하고 작업 공정에 따라 원료 가공에서 제품 완성까지 함께 작업하는 경우 가 많았다. 경기 안성과 평안 정주 등 놋그릇 생산지가 유명하였다.
12 금강 유역의 강경장은 조선 후기 최대의 포구장시였으나 근대기 철도망의 발달로 쇠퇴하였다.
금강 유역에 있는 강경장은 18세기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영조 때의 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큰 배 와 작은 배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항구에 담같이 늘어서 있다.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큰 장에는 멀고 가까운 곳의 화물들이 모여 쌓인다.”라고 강경장을 묘사하였다. 강경장은 호남과 충청 지방에서 나는 갖가지 농산물과 해산물을 전국으로 내보내고, 또 각지의 특산물이 들어오는 전국 최대 시장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05 년 경부선의 개통으로 충청도 내륙과 경기도 지역이 상권에서 이탈하였고, 군산선과 호남선이 생기면서 해산 물 집산지로서의 기능도 잃었다. 이에 따라 강경장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4 조선 후기에 일본에서는 조선의 인삼을 구매하고자 별도의 은화를 주조하였다.
인삼은 중국의 비단, 일본의 은과 함께 조선 시대 동북아시아 무역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무역품이었다. 17세기 초부터 일본에서는 조선의 인삼을 수입하기 위해 ‘인삼대왕고은’이라는 특수 화폐를 주조할 정도로 인삼에 대 한 수요가 많았다. 이 화폐는 120개가 있어야 조선 인삼 1근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임상옥은 우리나라 최초로 국경 지대에서 인삼 무역을 독점한 거상이었다. 중국인들은 조선 사절단을 따라오는 조선 상인들을 통해 인삼 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이들은 사신관 앞에 인삼국을 차리고 인삼 거래를 하였는데, 그 규모가 매우 컸다고 한 다.
15 조선의 역관은 사행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01 조선의 법제적 신분제인 양천제는 사림 집권기를 거치며 실생활에서는 점차 반상제로 대체되어갔다.
02 일부 공노비는 유외잡직이라는 벼슬을 받기도 하였다.
공노비 중에는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정원을 가꾸고, 요리를 하고, 의복을 제조하는 등의 기술을 가진 경 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일을 맡은 노비에게는 유외잡직이라는 벼슬이 주어졌다. 일반 관직과 구별되는 유외잡 직은 노비뿐만 아니라 장인과 상인도 받을 수 있었다. 유외잡직은 공조, 교서관, 사섬시, 조지서, 사옹원, 사복 시, 군기시, 선공감, 장악원, 도화서 등의 관청에 소속되어 물품 제조, 책 인쇄, 종이 제조, 요리, 바느질, 악기 연 주, 그림 그리기 등의 일을 한 사람들을 말한다.
03 일반적으로 사노비보다는 공노비의 처지가 비교적 나았다.
04 균역법에 따라 선무군관으로 편제된 이들은 신분 상승 운동을 전개하였다.
05 “옥계십이승첩”, 유숙의 “수계도권” 등은 조선 후기 중인 문학의 발달을 반영하고 있다.
“옥계십이승첩”은 18세기 중인들의 시 모임 중 가장 대표적인 옥계시사에서 만든 시화집이다. 유숙이 그린 “수 계도권”은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353년에 곡수천(曲水川)에서 가진 모임을 1500년 후인 1853년에 우리 강토인 서울 남산에서 재현한 것을 그린 그림이다. 중인 출신의 여항문인 30명이 모여 시를 짓고 이를 기념하 기 위해 제작한 시화집(詩畵集)이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인들은 양반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시회(詩會) 등의 모임을 조직하여 자신들의 학문과 교양이 양반 못지않음을 보여 주고자 하였다.
06 조선 후기 고마고(雇馬庫)의 수탈은 농민 봉기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07 홍경래는 열흘 만에 선천, 정주 등 청천강 이북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으나 송림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한 후 정주성에서 저항하다가 5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08 철종 때 삼정이정청에서는 동포제 실시, 사창제 부활 등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01 정도전은 “불씨잡변”, 권근은 “오경천견록” 등을 통해 성리학을 조선의 정치 이념으로 자리매김하였다.
03 조선 세종 때 이천과 이순지는 천문, 역법을 비롯한 과학 기술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이천은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천문 기구를 제작하고, 금속 활자의 꽃으로 평가받는 갑인자 제작을 주도하였 다. 이 밖에 화약 무기 개발, 악기 개량, 도량형 표준화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활약했던 대표적인 기계 기술자로, 측우기, 자격루, 앙부일구, 혼천의 등과 갑인자 제작에 참여하였다. 이순지는 천문 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중국과 서역의 천문학을 연구해 독자적인 역법서인 “칠정산”을 편찬하 였다.
04 16세기 조선 성리학계에서는 천명도의 해설을 시작으로 사단 칠정 논쟁 등이 전개되었다.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는 전례 없이 천명도(天命圖)를 여러 점 내놓았다. 천명도는 천명이 심성에서 발동하는 구조를 그린 그림이다. 천명도의 효시는 권근이 제작한 것이었으나, 본격적인 것은 16세기 중반부터 나왔다. 이 황, 김인후, 기대승 등이 각기 천명도를 그리고 해설을 붙였다. 이렇게 천명사상을 중시하는 경향은 인, 의, 예, 지의 사단(四端)과 희, 노, 애, 락, 애, 오, 욕의 칠정(七情)을 이기(理氣)로 해석하는 사단 칠정론을 탄생시켰다. 이후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8년에 걸친 사단 칠정 논쟁이 전개되었고, 이이, 성혼 등 수많은 학자들이 이에 가 담하였다. 이와 같이 천명사상이 강조되고 사단 칠정론과 이기론이 발달한 것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특색이다.
05 16세기 서경덕은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선비로 지내면서 독창적인 주기 철학을 수립하였고, 조식은 경 (敬)과 의(義)를 근본으로 하는 실천적 학풍을 열었다.
06 16세기 박상은 존화주의적 문화 의식이 반영된 역사서인 “동국사략”에서 개국공신을 비판하고 역성혁 명에 반대한 사대부를 칭송하였다.
07 설화 문학으로 서거정은 국왕과 관료들의 언행이나 민간 풍속을 모아 “필원잡기”를, 성현은 민속이나 문 학에 대한 글을 모아 “용재총화”를 펴냈다.
09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원 대에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지도인 ‘성교광피도’를 기초로 하 였다.
10 양산보가 담양에 세운 소쇄원, 정철의 가사 문학의 산실이었던 식영정, 윤선도가 보길도에 세운 세연정 등은 조선의 대표적인 정원 건축이다.
11 조선 전기에는 관료와 사림을 비판한 방외인 문학이 나타났다.
한편, 관료와 사림을 비판한 방외인 문학이 나타났다. 방외인은 사회 질서 밖에서 방랑하면서 기이한 행적을 남겼고, 대개 도가의 선술(仙術)이나 민간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체제 비판적인 시나 소설을 즐겨 썼다. 15세기 말 김시습으로부터 시작된 방외인 문학은 16세기 들어와 임제, 어숙권 등이 활약하면서 사회 비판적 성격이 더 욱 커졌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원생몽유록”, “패관잡기” 등이 있다.
12 임제의 “원생몽유록”은 사육신과 단종의 사후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세조를 비판하였고, 어숙권의 “패 관잡기”는 적서 차별과 같은 신분제의 모순을 부각시켜 기술하였다.
14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 400여 종의 책을 참고하였으며, 한치윤은 객관적인 저술을 위해 중국과 일본 의 사서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다.
15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자영농을 중심으로 군사와 교육 제도를 재정비하고, 노비 세습제를 혁파하자 고 주장하였다.
16 이익은 노비 제도를 비판하면서, 당장 폐지할 수 없다면 노비 매매만이라도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 다.
18 이익의 영향을 받은 남인계 소장학자들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등지에서 유교, 서학 등의 강학 모임을 가졌다.
20 홍대용은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에 입각하여 존화주의를 비판하였다.
공자가 주를 중국 역사의 정통으로 보고 저술한 역사서가 “춘추”이고, 여기에 바탕을 둔 것이 춘추 대의론이다. 역외 춘추론이란 춘추 대의론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세계에 안과 밖이 없으니 내가 서 있는 땅이 세계의 중심 이라는 사상이다. 홍대용을 비롯한 북학자들은 지구 구형설에 근거하여 세계의 중심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천하관을 부정하였다.
21 18세기에는 평양 대동문, 경주 불국사 대웅전, 수원 화성이 만들어졌다.
22 보은 법주사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오층 목탑이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사명당 유정 스님이 복원하였으며, 탑 아래 월대와 계단은 통일 신라 때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23 “색경”과 “산림경제” 등에는 축산, 어업과 관련하여 동식물학에 대한 설명이 있다.
24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문학이 보급되어 세책방, 방각본 출판이 유행하였다.
27 유희는 『언문지』에서 훈민정음이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는 우수한 표음 문자임을 밝혔으며 우리말 어휘를 정리하여 『물명고』를 편찬하였다.
28 안경창은 전염병을 치료하고자 『벽온신방』을 저술하였다.
29 최석정은 대수와 기하 이론을 정리한 『구수략』을 썼다.
30 김홍도는 여행하면서 목격한 장면을 그린 풍속화인 ‘행려풍속도’를 남겼다.
01 조선은 조미 조약을 근거로 일본과의 통상 장정을 개정하여 관세를 적용할 수 있었다.
02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 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조선의 중립국화를 주장하였 다.
03 청의 중재를 통해 영국군이 2년 만에 거문도에서 철수한 뒤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 간섭이 더욱 강화되 자, 고종은 내무부를 설치하여 반청 정책의 중심 기구로 활용하고 미국과 우호 관계를 지속적으로 강화 하려 하였다.
04 1890년 수백 명의 상인들과 시민들은 청·일본 상인들의 철수를 요구하며 연좌시위에 들어갔고, 쌀가게 를 제외한 육의전, 술집, 음식점 등 거의 모든 상점이 동맹 철시에 동참하였다.
05 군국기무처의 개혁 입법 가운데는 농민군의 요구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개화파 정부는 이러한 취지를 농민군에게 설득하고자 지방에 선유사를 파견하였다.
06 청ㆍ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새로운 공사를 파견하여 박영효를 내각에 참여시키고 일본인 고문 관을 배치하였다.
08 갑오개혁 이후 정부는 “조선역사”, “동국 역대 사략”등 한국사 교과서를 편찬하여 독립과 자주 의식을 강조하였다.
09 독립 협회는 공식적인 기관지로 대조선 독립협회 회보를 발간하였으며 서재필이 창간하고 윤치호가 이 어받은 독립신문도 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다.
10 대한 제국이 수립되자 일본은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자 가장 먼저 승인하였다.
12 대한 제국은 외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벨기에(1901), 덴마크(1902)와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만국 우편 연합(1900), 국제 적십자사(1903) 등 국제기구에도 가입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가하였다.
13 대한 제국은 광산, 산림, 철도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을 막고자, 1898년 모든 광산의 채굴권을 궁내 부로 이관하였다.
14 이한응은 을사늑약의 토대가 된 제2차 영·일 동맹을 막아 내지 못한 책임감 때문에 을사늑약이 체결되 기 전에 자결하였다.
16 일본은 제1차 한․일 협약 체결 후, 궁내부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세목을 탁지부로 돌려 황실 재정을 대폭 축소하였다.
19 1900년 이후에는 황제의 복장이 서양식 제복으로 바뀐 데 이어 문관도 서양식 제복이나 연미복을 착용 하였다.
20 서양식 건물로는 1888년 경복궁 안에 관문각이 세워졌으며, 경운궁에도 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이 들 어섰다.
23 1895년 정부는 공문서 서식에 관한 칙령 제86호에서, ‘법률, 명령은 모두 국문(한글)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 번역을 첨부하며, 혹은 국한문을 혼용함.’이라고 규정하였다.
24 신채호는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들의 전기를, 박은식은 “동명성왕 실기”, “천개소문전” 등 고구려의 기개를 높게 평가하는 책을 지었다.
25 서사 문학에서는 박은식의 “서사건국지”,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등 전기 소설과 현실 풍자적인 박은식 의 “몽배금태조”, 안국선의 “금수회의록” 등이 출간되었다.
26 자신회라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던 나철은 단군교를 창시하였다.
27 신채호는 기독교와 유교의 좋은 점을 합쳐 국민적 종교를 만들자는 주장을 하였다.
28 박은식이 말하고 있는 ‘국혼’은 민족정신을 가리키는 것인데, 신채호도 이를 민족의 정수라는 뜻으로 ‘국 수’라고 부르면서 보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29 1905년 이후 결성된 여자 교육회, 진명 부인회 등 여성 단체들은 찬양회와 마찬가지로 양규 의숙, 진명 여학교 등의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31 안용복 사건 이후 조선 정부에서 편찬한 “동국문헌비고”에는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于山國) 땅인 데, 우산은 바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이다.”라고 하여 “세종실록지리지”보다 더 명확하게 독도 가 기록되어 있다.
01 연무당은/는 강화 유수가 병사들을 열병하던 곳으로, 1876년에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 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이동휘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저항하여 이곳에서 대한 자강회 총회를 개최하 였다.
02 대동상회은/는 1883년 평안도 상인 20명이 수십만 냥 이상의 자금을 출자해 설립한 유통회사이 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회사로, 당시로서는 가장 규모가 컸으며 해외 무역에까지 진출하였다.
03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가 몰락하였으나, 집권 세력은 자주적인 개혁을 위해 개화 정책의 필요성을 인 식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적 산업 기술을 도입하는 개화 정책을 계속 추진하 였다. 근대적 의료 시설인 제중원 (1885), 전신 가설을 위한 전보국 (1885), 근대식 교 육 기관인 육영공원 (1886), 사관 양성을 위한 연무 공원 (1888) 등을 설립하였으며, 이 과 정에서 외국인 교사와 기술자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04 동학 농민군은 폐정 개혁안에서 세곡 운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농민에게 쌀을 징수하는 등 폐단이 많 았던 전운소 을/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외 지방관의 수탈을 금하고 궁방전을 없앨 것 등 을 주장하였다.
05 일본은 이권 침탈 경쟁에 뒤늦게 뛰어들어 철도 부설권, 금광 채굴권 등을 가져갔다. 일본은 미국인 모스 에게서 경인선 부설권을 사들이고, 러시아와/과 경합하여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 하였다. 또한 대한 제국과 한·일 양국 공동 경영을 전제 조건으로 경부 철도 합동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8).
06 대한 제국 수립에 반발하였던 청은 결국 대한 제국의 지위를 인정하고 양국 황제의 이름으로 한청통상조약 을/를 체결하였다(1899).
07 대한 제국은 궁내부 산하에 황실 재정 담당 기관인 내장원 을/를 설치하고 궁방전의 관리, 인삼 전매, 광산 개발, 철도 부설 등 수익이 나오는 사업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곳은 정부 대신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므로 모인 자금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08 대한 제국 황실에서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우편 학당과 전무 학당 등 실업 학교들을 설립하였다. 또한 궁내부 산하에 서북철도국 을/를 설치하여 경의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하였고,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금본위제에 바탕을 둔 지폐를 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으로 모두 무산되었다
09 을사늑약의 체결로 대한 제국에 주재하고 있던 외국 사절들은 모두 철수하였고, 미국, 러시아 등 해외에 두었던 대한 제국의 공사관과 영사관도 철수하였으며, 대한 제국의 외부도 없어지게 되었다. 일 본은 전국 개항장에 이사청을 설치하여 일본인의 활동과 이익을 보장하였다.
10 1904년에 조직된 국민 교육회는 비정치적인 계몽 단체였다. 이듬해 조직된 헌정연구회 은/는 겉으 로 연구 단체를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입헌 정치를 모색하는 민권 운동 단체로서 정치적 색채를 띠기 시작하였다. 대한협회 은/는 정당 정치론을 주장하고 스스로 정당임을 자처하는 등 헌정 연구회 이래 민권 운동의 가장 진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1 1908년 서울에서 조직된 서북학회 은/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지방 출신자들이 중심이 되었으 며, 서북 협성학교, 수상 야학, 심학 강습소, 농림강습소 등 많은 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중심 인물은 이동휘, 안창호, 박은식 등이었으며, 신민회와 같이 독립 전쟁을 최고 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운 동 기지 건설을 위해서도 힘을 기울였다.
12 금강 하구에 자리 잡은 군산 은/는 마산, 성진 등의 항구와 함께 고종의 칙령에 따라 자주적으 로 개항하였다. 조약에 따른 개항이 수동적이었다고 한다면, 칙령에 의한 개항은 능동적이었다. 고종은 세계 열강을 끌어들여 세력 균형을 이루려 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칙령 개항을 하였다.
13 1895년 정부에 위생국이 설치되고 전염병 예방 규칙도 제정되었다. 대한 제국도 이러한 정책을 이어받 아 1899년 관립 의학교와 함께 그 산하에 병원을 설립하였다. 이 병원은 1900년 광제원
(으)로 바뀌었으며, 1907년에 대한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4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와 함께 조선에 온 독일 여성이 1902년 서울 정동에 세운 손탁
호텔은 헐버트, 베델 등이 활동한 대한 제국 외교의 산실이었다.
15 한용운은 불교 근대화의 방안을 담은 “ 조선 불교 유신론 ”을/를 발표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적극적인 포 교를 위해 사찰이 산에서 도시로 내려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불교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려면 승려의 혼인을 허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한용운은 기독교의 개신교처럼 불교의 ‘개신’을 꿈꾸었다.
16 “ 월남망국사 ”은/는 현채가 국한문 혼용체로 번역하였고, 주시경이 순한글로 다시 번역하였다. 박은 식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아 훗날 “한국통사”, 즉 한국의 망국사를 집필하였다.
17 이화 학당에서 공부한 박에스더 은/는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로제타 홀의 도움으로 189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볼티모어 여자 의과 대학(현재 존스홉킨스 대학)에 입학하였고, 의학을 전공하여 학위를 받았다. 귀국 이후 그는 보구여관(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였고, 간 호 양성소도 설립하였다.
18 대한 제국은 1901년 회령에 변계 경무서를 설치하고 이듬해 이범윤을/를 간도 시찰사로 파견 하였다. 1903년에는 간도 지역에 대해 사실상 영유권을 확보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국내와 간도 지역의 한국인 사이에서 일고 있던 간도 영유권 주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정부는 간도에 파견되어 있던 ㅇㅇㅇㅇㅇㅇㅇ이범윤 을/를 간도 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의 토지와 호구를 조사하고 조선인을 보호하는 영 사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다. ㅇㅇㅇㅇㅇㅇㅇ이범윤 은/는 간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관청을 설치하고자 간 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에게서 조세를 징수하였다.
01 국권 강탈 후 일제는 지방 행정 조직을 개편하여 전국을 13도 12부 220군으로 나누고 전통적인 공동체 조직을 해체시켜 한국인의 저항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면과 동·리를 통폐합하였다.
02 1909년 10월 통감부가 설치한 한국은행은 국권 상실 후인 1911년 8월 ‘조선은행법’에 따라 조선은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03 1920년대에 일제는 한국의 도로 교통을 일본과 같은 좌측통행으로 강제하였다.
04 1915년 평양의 숭실 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 국민회는 하와이에서 조직된 대조선 국민군단의 국내 지부 성격을 갖고 있었다.
05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 대표들은 일원화, 대중화, 비폭력화의 원칙을 정하고 민족 대표 33명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전국 각지에 배포하였다.
07 3·1 운동 이후 일제가 발표한 제2차 조선 교육령으로, 3면 1교 정책에 따라 보통학교가 증설되었고 대학 설립도 가능해졌다.
08 한용운은 1931년 “불교”에 기고를 통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11 강주룡은 서간도에서 남편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다가, 남편이 죽은 뒤 귀국하여 평양 평원 고무 공장 여 성 노동자가 되었다. 1931년 5월 사측이 대공황의 피해를 노동자들에게 떠 넘기며 일방적으로 임금 삭 감, 근무 시간 연장, 정리해고를 단행하자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농성을 벌였다.
14 1920년에 노동자 권익 옹호를 목표로 조선 노동 공제회가 만들어졌는데, 이 단체에는 농민 운동을 지원 하는 농민부와 소작인부가 설립되어 있었다.
15 1930년대의 대표적 노동 쟁의로는 함남 신흥 탄광에서 발생한 노동자 투쟁과 평양 평원 고무 공장 노동 자 파업이 있다.
16 1930년대의 대표적 소작 쟁의로는 1931년 평북 용천군 불이흥업의 서선 농장에서 발생한 소작 쟁의와 1932년 경남 김해군 박간 농장에서 일어난 소작 쟁의가 있다.
17 일제는 1912년 조선 민사령을 시행하였는데, 이에 따라 남성만이 호주가 될 수 있었고, 호주는 가족 내에 서 강력한 가부장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여성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18 소년 운동이 확산되면서 1927년에는 전국적 조직인 조선 소년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1930년대가 되면 서 일제는 소년 운동을 민족 운동으로 간주하여 탄압하였고, 중·일 전쟁 이후에는 완전히 금지하였다.
20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국경 지역을 수십 차례 공격하여 압록강 연안의 혜산진을 점령하기도 하 였다.
22 1930년대에는 전국 각지에 색복 장려회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흰옷에 염색을 하자는 강연회를 열었 으며, 장시를 중심으로 염색법을 가르치는 모임을 개최하였다.
23 일제는 1942년부터 일바지, 일명 ‘몸뻬’를 입도록 강요하였다. 일바지를 입지 않은 여성은 관공서, 극장 출입이 금지되었다.
24 총독부는 학교, 공장, 마을에 종을 만들어 달고, ‘시간의 날’을 제정하는 등 시간관념을 심어 주려 하였다. 1914년 경원선과 호남선에 이어 1928년 함경선이 개통되어 한반도에 X 자형 간선 철도망이 완성되었고, 이는 다시 만주까지 연결되었다.
25 1926년 조선어 연구회가 정한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은, 1928년부터 ‘한글날’로 바뀌었다.
26 1920년에 체육인들은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조선 체육회를 만들었다. 한국인의 체육 활동이 큰 성과를 이루자 일제는 조선 체육 협회를 조직하여 이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27 한국화에서는 안중식, 허백련 등이 활동하였고, 서양화는 일본에서 유학한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등에 의해 개척되었다. 고희동의 ‘자화상’과 김관호의 ‘해 질 녘’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28 1940년대 이후에는 이중섭이 소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고 조소에서는 비평가인 김복진이 미륵불 과 인물상을 중심으로 독특한 작품들을 남겼다.
29 1935년에는 변사가 대사를 읽던 무성 영화를 대신하여 최초의 유성 영화가 제작되었다.
01 신채호, 박은식, 조소앙 등이 1917년 상하이에서 발표한 대동 단결의 선언 , 1918년에 박은식, 신채호, 김좌 진, 이승만 등 국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만주에서 발표한 대한 독립 선언
(무오 독 립 선언서)은/는 3ㆍ1 운동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02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는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이동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조직인 한인 사회당 dd 이/가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통일 전선의 성격도 함께 가졌다. 반면, 연해주와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dddddddddd 대한 국민 의회 계열의 무장 투쟁론자들과 베이징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열 투쟁론자들은 외교 독립론 중심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03 임시 정부의 초기 활동은 외교에 집중되었다. 신한 청년당의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dddddddddd 김규식 을/를 임시 정부의 전권 대사로 임명하여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미국에 는 구미 위원부
을/를 설치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 사회에 제기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승만 등 은 1921년 열린 워싱턴 회의에 독립 요구서를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2년에는 이동휘, 김규식 등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 대표 대회에 참석하여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받 았다.
04 1921년에 방정환을 비롯한 천도교 청년들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라는 최시 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dddddddddd 천도교 소년회 을/를 창립하였다. 방정환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접하자는 뜻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는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고 바르게 키우는 것이 독립 운동의 인 재를 양성하는 길이라 여겼다. dddddddddd 천도교 소년회 은/는 1923년부터 매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해 기 념행사와 소년 보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잡지 『어린이』를 발간하여 동요와 동화 등을 실으며 소년 애 호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어 방정환은 일본에서 유학생들과 함께 어린이 연구 단체인 dddddddddd 색동회 을/를 창립하였다. 한편 1922년에 조철호는 보이 스카우트의 전신인 조선 소년군을 창설하였다.
05 조선일보은/는 1924년 이상재가 사장에 취임한 이후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처음으로 조·석 간을 발행하고, 최초로 여기자 최은희를 채용하기도 하였다. 또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의 본부와 같 은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은/는 20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편집진을 구성한 청년 신문 이었다. 훈춘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한국 동포 학살 사건을 취재하러 갔던 기자가 일본군에 피살되어 한 국 언론사상 최초로 순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06 1920
년대 소작 쟁의는 소작료 인하, 지세 공과금의 지주 부담, 소작권 이동 반대 등 생존권을 요구하는 투쟁이 많았다. 이 시기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는 전남 무안군의 암태도 소작 쟁의, 황해도 재령 군 북율면 소작 쟁의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소작 쟁의는 소작인 조합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각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이를 지원하였다. 이후 농민 운동이 대중 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기존 소작인 조합은 자작농을 포함하는 농민 조합으로 개편되어 갔다.
07 대공황으로 1930년대 들어 농민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자 소작 쟁의가 급증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소작인이 지주와 분쟁이 있을 때 당국에 조정을 요청하도록 하는 조선 소작 조정령을/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소작 쟁의는 대부분 규모가 축소되었고, 점차 개인적인 쟁의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에 참여하는 소작농이 늘어나자, 일제는 1934년 ㅇㅇㅇㅇㅇㅇㅇ 조선 농지령
을/를 시행하여 작물에 따라 소작 기간을 3~7년으로 하였다. 이는 소작인의 소작권을 안정시켜 농촌 사회의 불안을 완화하려는 것이었으나, 실제 운영 과정에서 지주의 권익을 옹호하고 마름 의 횡포를 전혀 통제하지 않았다. 또한, 소작료도 여전히 고율이어서 이러한 법령의 시행만으로 조선 농 촌의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08 근우회
은/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철폐, 조혼과 인신매매 폐지,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임금 차별 해소 등을 활동 목표로 내세웠다. 또 국내 각 지방과 일본 도쿄, 간도 등에 지회를 두고 여성 교 양 강좌와 야학, 토론회를 열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문맹 퇴치 및 계몽 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신 간회가 해체되자 활동이 점차 활력을 잃었고, 결국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이탈함으로써 해체되었다.
09 신간회
은/는 강연단을 만들어 전국 각지를 돌며 민중을 계몽하는 한편,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시 행, 착취 기관 철폐 등을 주장하면서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비판하였다. 또 노동 운동, 농민 운동, 청년 운동, 여성 운동, 형평 운동 등 사회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1929년 일어난 원산 총파업을 지원하 고, 함경남도 갑산군 화전민 사건(1929,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증가한 화전민들이 함경남도 갑산 지역에서 일제의 추방 정책에 저항하였던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0 6·10 만세 운동
을/를 계기로 전국의 중등학교에는 독서회가 조직되었고, 전남 광주의 성진회와 같이 학 생 운동을 지도하는 비밀 결사 형태의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식민지 교육 반대와 조선인 본위 교 육 등을 내걸고 동맹 휴교를 전개하면서 계급 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전개된 함흥 고보의 동맹 휴교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례였다.
11 1911년 북간도에서 대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항일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임시 정부 군무부 산하의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면서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군사령관으로 삼아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북로 군정서는 사관 연성소
을/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훈련하고 사관을 양성하는 한편, 군비와 무기 확충에 노력하였다.
12 남만주에서는 서로 군정서와 대한 독립단 등이 통합하여 대한 통군부를 조직하였고, 이후 상하이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 육군 주만 참의부을/를 만들었다. 참의부는 지안 현을 중심으로 한인 사회 를 이끌어 가는 자치 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군사 조직을 갖추고 군사 교육도 실시하였다. 참의부 와 입장을 달리했던 세력은 국민 대표 회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김동삼을 중심으로 ㅁㅁㅁㅁㅁ 정의부 을/ 를 만들었다.
13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지고, 1926년 중국 국민당이 북벌을 시작하자 국민 대표 회의의 결렬 로 침체에 빠져 있던 중국 관내 지역의 민족 운동 세력은 새로운 활력을 찾았다. 이들은 안창호의 제창으로 민족 유일당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7년 관내 여러 조직의 연합체인 한국 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가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임시 정부도 개헌을 통해 앞으로 만들어질 민족 유일당이 임시 정부를 지휘한다는 이당치국 방침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927년 제1차 국공 합작이 와해되고 중국 국민 당과 중국 공산당의 대립이 격화되자, 민족 운동 세력 내에서도 좌우 대결이 격화되어 1929년 한국 독립 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가 해체되었다.
14 만주사변 이후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자들과 민중들은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를 조직하였다. 항일 유격대 들은 중국 공산당의 지원으로 조직되었지만, 그 구성원이나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 중국 공 산당은 항일 유격대들을 결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 을/를 조직하였고(1933) 이후 민족과 이념을 초월한 ㅇㅇㅇㅇㅇㅇㅇ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 개편되었다(1936). 한편, 조직 내 조선인들을 기반으로 반일 민족 통일 전 선 단체인 ㅇㅇㅇㅇㅇㅇㅇ 조국 광복회 이/가 조직되었다(1936). 이들은 장백현과 함남 및 평북에 지부를 설치하였으 며, 국내 조직원들과 함께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를 습격하여 일제의 통치 기관을 마비시켰다 (1937).
15 일제는 혜산 사건을 통해 조국 광복회의 국내 조직을 탄압하고 1939년부터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에 대 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40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내로 이동한 ㅇㅇㅇㅇㅇㅇ 동북 항일 연군 은/는 부대를 재편하고 그 곳에서 광복을 맞았다. 한편, 소련의 연해주로 이동하였던 동 북 항일 연군은 88 특별 여단으로 편성되어 소련군의 지도를 받았다. 소련군은 1945년 7월 88 특별 여 단 내의 한국인들로 조선 공작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는 전후 소련군 점령 지역의 통치를 위한 것이었다.
* 혜산 사건 : 1937년 10월과 1938년 9,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국 광복회 관련자를 검거한 사건이다. 739명의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조국 광복회의 국내 조직인 조선 민족 해방 동맹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6 윤봉길 의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 히 중국 중앙 육군 군관 학교 낙양 분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고 간부를 양성할 수 있게 하였다(1933). 이를 운영하기 위해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이 교관으 로 초빙되었다.
17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로 지청천을 사령관으로 한 한국 광복군 이/가 창설되었다. 이 군대는 4개 지대로 구성되었는데, 1942년에는 화북으로 북상하지 않은 조선 의용대 을/를 흡수하 여 김원봉과 이범석, 김학규를 지대장으로 하는 1, 2, 3지대로 개편하면서 병력이 증강되었다. 이 군대는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일본군에 소속된 한인 병사나 적 후방의 한 인 청년들에게 탈출·투항하여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18 화북 지방으로 이동한 조선 의용대는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로 조직을 개편하고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 에 승리하였다. 1942년에는 화북 지역에서 좌우 세력의 통일 전선을 지향한 조선 독립 동맹 이/가 결성 되었다. 주요 세력은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해 온 한인 사회주의자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 대원들이었 다. 이 조직의 결성과 함께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조선 의용군 (으)로 재편되었다. 이들은 중국 공 산당의 팔로군과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19 인구가 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에는 다양한 형태의 주택들이 보급되었다. 개량 한옥 은/는 전통 한옥에서 사랑을 없애서 대지를 좁힌 것으로,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고 벽돌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문화 주택 ㅇㅇㅇㅇㅇㅇㅇ 은/는 192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2층 양옥으로, 내부에 식당과 욕실, 화장실 등을 갖춘 상류층의 주택이었다. 영단 주택 은/는 일제가 심각한 주택난 해결을 위해 1941년 조선 주택 영단 을 설립하여 공급한 서민 주택으로, 일본식 주택 문화에 우리의 온돌을 가미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20 미주 지역의 한인 동포들은 1941년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 을/를 결성하고 의연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한편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국방 경비대(맹호군)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임시 정부는 한인 국방 경비대를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인정하였다. 한편,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 은/는 미 국 무부에 한국을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임시 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21 국내에서는 박헌영 을/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경성 콤그룹 등의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으며,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일제 경찰에 검거 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부 사회주의 세력은 책자, 유인물 등을 발간하여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전쟁의 실 태를 꾸준히 알리고자 하였다. 한편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있던 여운형 은/는 건국을 준비하 기 위하여 1944년 8월에 조선 건국 동맹을 조직하였다. 조선 건국 동맹은 징병으로 끌려가는 청년들을 탈출시키는 동시에,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면서 광복을 준비하였다.
22 조선 건국 동맹 은/는 전국 10개 도에 지방 조직을 설치하고, 산하에 농민 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징용· 징병, 식량 공출, 군수 물자 수송 등을 방해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후방 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 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국외 독립 운동 세력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 독립 동맹과 대 한민국 임시 정부와의 연계를 모색하였다.
23 조선 건국 동맹 강령 1.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 복할 것
2. 반추축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 세력을 박멸할 것
3. 건설 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위(施爲)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24 1945년 7월 24일 서울 한복판에 있는 부민관 에서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 이 조직한 친일 폭력 단체인 대의당의 주최로 일본, 중국, 만주 등지에서 온 친일파들이 참여하여 필승 체제의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한‘아시아 민족 분격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비밀 결사인 대한 애국 청년단의 단원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은 이곳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02 정전 회담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북한은 전쟁이 끝나는 즉시 포로를 모두 돌려보내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유엔군은 인도주의를 내세워 포로 본인이 스스로 돌아갈 곳을 결정해야 한 다고 주장하였다.
04 4ㆍ19 혁명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는 주요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하였다.
05 6·3 시위를 비롯한 한·일 회담 반대 집회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선 포하고 1차 인민 혁명당 사건 등을 일으켜 시위를 억누르려 하였다. 결국 위수령을 내려 군대를 동원한 가운데 한·일 협정을 체결하였다(1965).
06 전두환 정부 시기 일부 대학생은 5․18 민주화 운동 진압 당시 미국의 책임을 물어 부산과 서울의 미국 문 화원을 방화하거나 점거하기도 하였다.
07 대학생과 청년들은 전국 학생 연합과 민주화 운동 청년 연합회를, 민주 인사들은 민주화 추진 협의회를 결성하여 전두환 정부에 저항하였다.
08 민주화 추진 협의회는 신한 민주당을 창당하고 1985년 2월에 실시된 국회 의원 선거에서 다수의 당선자 를 배출하였다. 야당은 여세를 몰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서명 운동을 벌였다.
09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정치 활동 규제 철폐 등을 담은 시국 수습 방안을 발표하였고(6·29 민주화 선언), 그 결과 현행 헌법인 대통령 임기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 선출, 헌법 재판소 설치 등을 담 은 개헌이 이루어졌다(1987).
10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원자재와 중간재 등의 수입이 매년 증가하자 수출 기업의 재무 구조가 악화되 고, 부족한 자본을 충당하기 위해 들여온 대규모 차관은 외채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에 정부는 1970년에 마산 수출 자유 지역을 설정하여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모든 생산품을 국외로 수출하도록 하였다.
11 1949년 중등학교 이상 각급 학교에 결성된 준군사 조직 단체인 학도 호국단은 4·19 혁명 이후 폐지되었 다가 1975년 유신 체제하에서 부활하였으며, 1985년 다시 폐지되었다.
12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언론 통폐합을 실시하여 언론 규제를 강화하였고, 유신 체제 성립 이후에는 기자 등록제인 프레스 카드제를 실시하여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기자들의 활동을 제한하 였다.
14 신군부는 1980년 11월 언론사 사주들을 연행, 소환하여 언론 통폐합 조치를 통보하고 이의가 없다는 내 용의 각서를 강제로 받았다.
15 ‘대한늬우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매주 정부가 제작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했던 영상 보도물이었 다.
16 1961년 6월 25일, 재건 운동 서울시 지부가 여성 신생활 복장으로 표준 간소복을 권고하였다.
17 1976년 함평 농협이 고구마를 모두 구매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고구마 수매 가격을 낮추려는 농협과 관련 기업의 농간으로 수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함평 농민들은 3년에 걸친 피해 보상 운동 끝에 피해를 보상받았다.
15 ‘대한늬우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매주 정부가 제작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했던 영상 보도물이었 다.
16 1961년 6월 25일, 재건 운동 서울시 지부가 여성 신생활 복장으로 표준 간소복을 권고하였다.
17 1976년 함평 농협이 고구마를 모두 구매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고구마 수매 가격을 낮추려는 농협과 관련 기업의 농간으로 수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함평 농민들은 3년에 걸친 피해 보상 운동 끝에 피해를 보상받았다.
19 1991년에 우리나라는 국제 노동 기구(ILO)에 가입하여 국제 수준의 노동 규칙을 따르게 되었다.
20 1995년에는 전국 민주 노동조합 총연맹(민주노총)이 결성되어 기존의 한국 노동조합 총연맹(한국노총) 과 함께 양대 노총 시대를 열었다.
21 문학 분야에서는 4·19 혁명 이후 참여 문학이 등장하여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김수영의 ‘꽃잎’ 등의 시가 널리 읽혔으며, 최인훈이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 “광장”을 발표하였다.
20 1995년에는 전국 민주 노동조합 총연맹(민주노총)이 결성되어 기존의 한국 노동조합 총연맹(한국노총) 과 함께 양대 노총 시대를 열었다.
21 문학 분야에서는 4·19 혁명 이후 참여 문학이 등장하여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김수영의 ‘꽃잎’ 등의 시가 널리 읽혔으며, 최인훈이 분단 문제를 다룬 소설 “광장”을 발표하였다.
22 1970년대에 김지하는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등을 비판한 시 ‘오적’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 혐의 로 투옥되었다.
23 1970년대 조세희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통해 도시 빈민의 삶을 그렸다.
24 1980년대에는 5·18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민중 문학이 형성되었으며,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 으로 분단 문학도 발달하였다.
23 1970년대 조세희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통해 도시 빈민의 삶을 그렸다.
24 1980년대에는 5·18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민중 문학이 형성되었으며,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 으로 분단 문학도 발달하였다.
01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치안대를 창설하고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식량 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 확보에 주력하였다.
여운형은 미군이 진주하기에 앞서 미리 정부 조직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 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지 부들은 인민 위원회 (으)로 전환되어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02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처하고 경제 성장을 지 속하려 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 동원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1968년 향토 예비군 을/를 창설하였 다. 또한, 확고한 안보 의식과 투철한 국가관을
확립한다며 대학에서부터 군사 교육을 확대해갔다.
나아 가 국민 모두가 반공정신을 갖추고 국가에 충성하도록 요구하는
국민 교육 헌장 을/를 제정하였다.
03 1973년에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던
김대중을/를 납치한 사건이 일어나 자 장준하, 백기완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개헌 청원 1백만인 서명 운동 을/를 추진하는 등 유신 반대 운동이 활발해졌 다. 정부는 긴급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여
정부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 하였고,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 맹 사건(민청학련 사건),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 사건(2차 인민 혁명당 사건)을 조작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신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계속되었고, 1976년에는 재야인사들
이 명동 성당에 모여 유신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3·1 민주 구국 선언 을/를 발표하였다. * 2차 인민 혁명당 사건(1974) : 중앙정보부는 노동 악법 철폐, 유신 폐지 등을 요구하는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맹의 배후에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가 전복을 노리는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가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04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첫 번째 시위는
1979년 11월 24일 서울 YMCA 에 서 열린 ‘통대(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대통령)
선출 저지 민주화 촉구 대회’였다. 참석자들은 “어째서 또 한 차례의 유신 대통령 선출이
필요하며, 어째서 금후 5년까지의 유신 독재 연장이 필요하단 말인가.”라 며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고 거국 민주 내각을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집 회는 결혼식을 위장하여 열린 것이어서 ‘
위장 결혼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05 19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로 국내에 식량과 의복, 의약품
등 생활 필수품이 들어왔으며, 원조 물자를 가 공한 면방직업,
제당업, 제분업의
삼백 산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시멘트 공장과 비료 공장 등 의 건설, 철도와
항만 보수, 발전소 건설과 같은 기간산업이 복구되어 갔다. 1957년에
이르면 주요 산업 기반과 공장이 대부분 복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후 한국 경제는 연 5% 내외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 였으며, 국민 총생산과 국민 총소득도 늘어났다.
06 박정희 정부는 장면 내각이 수립해 놓았던
경제 개발 계획을 기초로 하여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2~1966)을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수입 대체 산업을 육성하려고 하였으나,
곧바로 수출 산업 육성으 로 전환하였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독일과 일본 등에서
빌려 오거나 베트남 등에서 벌어들여 충 당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는 의류, 신발 등 노동 집약적 산업을
육성하여 수출을 늘렸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은
시멘트, 전력 등 기간산업 육성과 도로, 항만 등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울산공업 단지(1967)와
마산 수출 자유 지역(1970)이
조성되고
포항d 종합 제철이 설립되었다. 또한
소양강 댐과 경부 고속 국도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수출 자유 지역은 외국 기업이 원료와 반제품을 관세없이
들여와 가공, 제조, 조립하여 수출할 수 있는 공업 지역이었다.
07 1960년대 말 국제 경기가 악화되면서 수출이 감소하고
외채가 누적되었다. 또 기업들은 사채를 상환 하는 데 압력을
받아 도산 위기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사채 동결과 대기업에
대한 금융·조세 특혜를 제 공하는 조치를 취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8·3 조치, 1972).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72~1976)과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은
중화학 공업과 전자 공업 육성에 중점을 두 었다.
이에 따라 구미, 울산, 여수에 대규모 공업 단지가 조성되었다.
08 1969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쌀이 없는 날’로 지정하는 한편, 점심때마다 학생 들의
도시락을 검사하여 혼식을 강제하였다. 이에 따라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통일벼 (이)라는 다수확 품종의
보급으로 쌀의 자급이 달성되자, 정부는 1977년 분식의
날을 해제하였다.
09 1945년 9월에 미군정은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야간
통행금지 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6·25 전 쟁 이후에 제주도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고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시 행되다가 나중에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로 단축되었다.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지면
도심이 조 용해졌으며, 이따금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만이
정적을 깨곤 하였다. 위반한 사람들은 경찰서에 연행되 어
즉결심판을 받은 뒤 과태료를 내야 풀려날 수 있었다.
1982년 1월 6일에 폐지되었다.
10. 1962년 국외이주법이/가 국외 이주법제정되면서 합법적인 국외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해에 브라질로 농업이민 92명이 출발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외화를 획득하고자 이민이나
국외 이주를 장려하였다. 정부는 1966년에 서독과 특별 고용 계약을 맺고
간호사 3천 명, 탄광 광부 3천 명을 파견하였다. 1977년까지 진 행된 파견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69년 국립 현대 미술관 개관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식 1981년 서울 동숭동 문예 회관 건립 1988년 예술의 전당 건립 1989년 경제 정의 실천 시민 연합 1990년 가족법 제정 2008년 호주제 폐지 1991년 제41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남북한 단일팀 출전 2000년 개성 공단 설치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남북 공동 응원 1977년 의료 보험법 제정, 1989년 도시 자영업자에게 확대, 2000년 국민 건강 보험으로 통합 1988년 국민 연금 제도 도입, 1999년 도시 거주 자영업자 가입 1995년 고용 보험 제도 실시 1991년 한국 국제 협력단(KOICA) 설립 1991년 걸프 전쟁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국군 의료 지원단 파견 1993년 소말리아에 상록수 부대 파견 2010년 서울에서 G20 정상 회의 개최 2011년 부산에서 세계 개발 원조 총회 개최
여운형은 미군이 진주하기에 앞서 미리 정부 조직을 만들어 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 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지 부들은 인민 위원회 (으)로 전환되어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02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대처하고 경제 성장을 지 속하려 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군사 동원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1968년 향토 예비군 을/를 창설하였 다. 또한, 확고한 안보 의식과 투철한 국가관을
확립한다며 대학에서부터 군사 교육을 확대해갔다.
나아 가 국민 모두가 반공정신을 갖추고 국가에 충성하도록 요구하는
국민 교육 헌장 을/를 제정하였다.
03 1973년에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유신 반대 운동을 벌이던
김대중을/를 납치한 사건이 일어나 자 장준하, 백기완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개헌 청원 1백만인 서명 운동 을/를 추진하는 등 유신 반대 운동이 활발해졌 다. 정부는 긴급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여
정부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 하였고,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 맹 사건(민청학련 사건),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 사건(2차 인민 혁명당 사건)을 조작하여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신을 반대하는 움직임은 계속되었고, 1976년에는 재야인사들
이 명동 성당에 모여 유신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3·1 민주 구국 선언 을/를 발표하였다. * 2차 인민 혁명당 사건(1974) : 중앙정보부는 노동 악법 철폐, 유신 폐지 등을 요구하는 전국 민주 청년 학생 총연맹의 배후에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가 전복을 노리는 인민 혁명당 재건 위원회가 있다고 주장하며,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
04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첫 번째 시위는
1979년 11월 24일 서울 YMCA 에 서 열린 ‘통대(통일 주체 국민 회의의 대통령)
선출 저지 민주화 촉구 대회’였다. 참석자들은 “어째서 또 한 차례의 유신 대통령 선출이
필요하며, 어째서 금후 5년까지의 유신 독재 연장이 필요하단 말인가.”라 며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고 거국 민주 내각을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집 회는 결혼식을 위장하여 열린 것이어서 ‘
위장 결혼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05 19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로 국내에 식량과 의복, 의약품
등 생활 필수품이 들어왔으며, 원조 물자를 가 공한 면방직업,
제당업, 제분업의
삼백 산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시멘트 공장과 비료 공장 등 의 건설, 철도와
항만 보수, 발전소 건설과 같은 기간산업이 복구되어 갔다. 1957년에
이르면 주요 산업 기반과 공장이 대부분 복구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후 한국 경제는 연 5% 내외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 였으며, 국민 총생산과 국민 총소득도 늘어났다.
06 박정희 정부는 장면 내각이 수립해 놓았던
경제 개발 계획을 기초로 하여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62~1966)을 추진하였다.
처음에는 수입 대체 산업을 육성하려고 하였으나,
곧바로 수출 산업 육성으 로 전환하였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은 독일과 일본 등에서
빌려 오거나 베트남 등에서 벌어들여 충 당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는 의류, 신발 등 노동 집약적 산업을
육성하여 수출을 늘렸다.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은
시멘트, 전력 등 기간산업 육성과 도로, 항만 등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울산공업 단지(1967)와
마산 수출 자유 지역(1970)이
조성되고
포항d 종합 제철이 설립되었다. 또한
소양강 댐과 경부 고속 국도가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수출 자유 지역은 외국 기업이 원료와 반제품을 관세없이
들여와 가공, 제조, 조립하여 수출할 수 있는 공업 지역이었다.
07 1960년대 말 국제 경기가 악화되면서 수출이 감소하고
외채가 누적되었다. 또 기업들은 사채를 상환 하는 데 압력을
받아 도산 위기에 직면하였다. 정부는 사채 동결과 대기업에
대한 금융·조세 특혜를 제 공하는 조치를 취하여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8·3 조치, 1972).
제3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72~1976)과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은
중화학 공업과 전자 공업 육성에 중점을 두 었다.
이에 따라 구미, 울산, 여수에 대규모 공업 단지가 조성되었다.
08 1969년 1월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
‘쌀이 없는 날’로 지정하는 한편, 점심때마다 학생 들의
도시락을 검사하여 혼식을 강제하였다. 이에 따라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통일벼 (이)라는 다수확 품종의
보급으로 쌀의 자급이 달성되자, 정부는 1977년 분식의
날을 해제하였다.
09 1945년 9월에 미군정은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야간
통행금지 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6·25 전 쟁 이후에 제주도 등
몇 군데를 제외하고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시 행되다가 나중에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로 단축되었다.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려 퍼지면
도심이 조 용해졌으며, 이따금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만이
정적을 깨곤 하였다. 위반한 사람들은 경찰서에 연행되 어
즉결심판을 받은 뒤 과태료를 내야 풀려날 수 있었다.
1982년 1월 6일에 폐지되었다.
10. 1962년 국외이주법이/가 국외 이주법제정되면서 합법적인 국외 이민이 시작되었다.
이해에 브라질로 농업이민 92명이 출발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외화를 획득하고자 이민이나
국외 이주를 장려하였다. 정부는 1966년에 서독과 특별 고용 계약을 맺고
간호사 3천 명, 탄광 광부 3천 명을 파견하였다. 1977년까지 진 행된 파견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69년 국립 현대 미술관 개관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식 1981년 서울 동숭동 문예 회관 건립 1988년 예술의 전당 건립 1989년 경제 정의 실천 시민 연합 1990년 가족법 제정 2008년 호주제 폐지 1991년 제41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남북한 단일팀 출전 2000년 개성 공단 설치 2003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남북 공동 응원 1977년 의료 보험법 제정, 1989년 도시 자영업자에게 확대, 2000년 국민 건강 보험으로 통합 1988년 국민 연금 제도 도입, 1999년 도시 거주 자영업자 가입 1995년 고용 보험 제도 실시 1991년 한국 국제 협력단(KOICA) 설립 1991년 걸프 전쟁 때 사우디아라비아에 국군 의료 지원단 파견 1993년 소말리아에 상록수 부대 파견 2010년 서울에서 G20 정상 회의 개최 2011년 부산에서 세계 개발 원조 총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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