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일찍이 송도에 있을 때 의정부를 없애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다, 지난겨울에 대간에서 의정부를 없앨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좌정승이, “중국에도 승상부가 없으니 의정부를 폐지해야 한다.”라고 건의하였다. 짐이 골똘히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짐 한 몸에 모이면 결재하기가 힘은 들겠지만, 임금이 어찌 고생스러움을 피하겠는가.
↳
‘짐’은? 태종
송도(개경)에서 한양 재천도
처음에 임금이 의정부의 권한이 무거운 것을 염려하여 이를 개혁할 생각이 있었으나 정중히 여겨 서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이 제도를 단행하니, 의정부에서 관장하는 것은 오직 사대문서(事大文書)와 무거운 죄수를 다시 살펴보는 것뿐이었다.
↳ 15.국가7/
‘이 제도’는? 6조 직계제(태종)
상왕이 어려서 무릇 조치하는 바는 모두 대신에게 맡겨 논의 시행하였다. 지금 내가 명을 받아 왕통을 계승하여 군국 서무를 아울러 모두 처리하며, 조종의 옛 제도를 모두 복구한다.
↳ 16.경찰1차/ 15.경찰1차/ 14.국회9/
상왕(단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김종서, 황보인 등의 재상에서 정치 실권이 넘어가자 문종의 동생이었던 수양대군(세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였다.
‘조종의 옛 제도를 복구’ 6조 직계제 부활(세조)
임금의 직책은 재상 하나를 잘 뽑는 데 있다. 재상은 위로는 임금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솔하여 만인을 다스리는 것이니 그 직책이 매우 크다. 또한 임금의 자질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으니 재상은 임금의 아름다운 점은 순종하고 나쁜 점은 바로잡아 임금으로 하여금 대중(大中)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재상의 역할이다.
↳ 14.서울7/ 13.국가9/
정도전 <조선경국전>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조준 등과 함께 급진적인 전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는 공민왕 때에 성균관에서 성리학을 강론하였고, 이인임의 친원 외교를 비판하여 전라도 나주로 유배되었다. 조선 왕조의 제도와 문물을 정리하고,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 15.사복9
‘그’는? 정도전 (1357년, 친원 배명 정책에 반대해 이인임
등과 대립하다 전라도 나주로 유배됨)
그는 공민왕 9년 과거에 응시하여 연달아 세 번 수석하여 1등으로 뽑혔다. 당시 고려에는 <주자집주>만이 수입되어 있었는데, 그의 가르침이 뛰어나 모두 그 내용을 의심하였다. 이후에 <사서통>이 들어왔는데, 그 내용이 그의 말과 다르지 않아 여러 선비들이 탄복하였다. 이색은 그에 대해 그 논리는 횡성수설 하여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 독사n제
‘그’는? 정몽주
- 당시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들은 권문세족과 불교
에 비판적이었으며, 정치개혁의 이념으로 <주례>를 중시
하였다.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인데 서초패왕에서 살해되어 빈 강에 버려졌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 보니 회왕은 중국 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으로 거리가 만 리나 떨어져 있는데 꿈에 나타난 징조는 무엇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는 기록이 없으니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야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한다.
↳ 13.법원9
(성종 때) 김종직 ‘조의제문’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글로, 후에 제자 김일손이 이 글을 사초에 실은 것이 드러나 많은 사림들이 화를 입은 사건을 무오사화(연산군, 1498)라 한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고
나라를 내 집안 근심하듯이 했노라.
밝은 해가 이 땅을 비치고 있으니
내 붉은 충정을 밝혀 비추리라.
↳ 10.국가9
조광조 <절명시>
-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고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였다. (O)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이튿날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다.
↳ 15.법원9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전쟁 초기 부산진에서 정발이, 동래부에서 송상현이 분진하였으나 패하였다.
왕이 “명이 만일 토벌을 나간다면 누르하치를 정벌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으니, 이시언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여진이 행군하는 것을 보았는데, 호령이 엄숙하고 기개가 날카로웠습니다. 지금 만일 명이 그들의 소굴로 깊이 들어간다면 주객의 형세가 아주 다를 것이니, 신은 크게 염려됩니다.
↳ 독사n제
임진왜란 등으로 명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명,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로 대처하였다.
갑자년에 이르러 한윤이 탈출하여 오랑캐의 땅으로 들어가 홍립을 만나 우리 조정이 그 가족들을 멸족했다고 속여 홍립의 효심을 자극하고 함께 칼을 거꾸로 잡고 조선을 공격할 계책을 세웠다. 1월에 철기를 규합하여 의주로 들어 닥치니…
↳ 독사n제
이괄의 난의 잔여 세력이 후금으로 들어가 강홍립과 후금에게 조선 침입을 종용하였다.
정주 목사 김진이 아뢰기를, “금나라 군대가 이미 선천, 정주의 중간에 육박하였으니 장차 얼마 후에 안주에 도착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께서 묻기를, “이들이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가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하여 온 것인가?”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듣건대 홍태시란 자가 매번 우리나라를 침략하고자 했다고 합니다.”하였다.
↳ 15.법원9
1627년 정묘호란 발발
인조반정 후 서인의 친명배금 정책, 1624년 이괄의 난, 명나라 모문룡의 가도 주둔이 후금을 자극하여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가) 일정한 직책에 매이지 않고 천하의 득실과 백성의 이해, 나라의 주요한 일에 관여하는 것은 재상만이 할 수 있으며 간관만이 말할 수 있을 뿐이니, 간관의 지위는 낮지만 직무는 재상과 다를 바 없다. -삼봉집
(나) 시정을 논하여 바르게 이끌고, 모든 관원을 살피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주고, 건방지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등의 일을 맡는다. -경국대전
(다) 궁궐 안에 있는 경적을 관리하고 문한을 관리하며, 왕이 물을 일을 대비한다. 모두 문관을 임용한다. 제학 이상은 다른 관부 관원이 겸한다. 모두 경연을 겸대한다.
↳ 16.기상9/ 15.법원9
(가)사간원 (나)사헌부 (다)홍문관
사간원의 장(長)은 정3품 대사간이다.
사헌부는 발해의 중정대, 고려의 어사대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홍문관은 집현전을 계승하여 설치하였으며 옥당으로 일컬어졌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니 마땅히 과전을 설치하여 사대부를 우대한다. 무릇 경성에 거주하여 왕실을 시위(侍衛)하는 자는 직위의 고하에 따라 과전을 받는다. 토지를 받은 자가 죽은 후, 그의 아내가 자식이 있고 수신하는 자는 남편의 과전을 모두 물려받고, 자식이 없이 수신하는 자의 경우는 반을 물려받는다.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그 자손이 유약한 자는 휼양전으로 아버지의 과전을 전부 물려받고, 20세가 되면 본인의 과에 따라 받는다. -고려사
↳ 13.지방9/ 12.계리9/
1391년 과전법(수신전, 휼양전)
(가) 농부의 둘째 손가락으로 열 번을 재어 상전척으로 삼
고,… 1결에서 조(租)는 모두 30두씩 거두는 것을 정
수로 하였다.
(나) 소출이 10분이면 상상년으로 정해 1결당 20두,… 2
분이면 하하년으로 4두씩 거두며 1분이면 면세하였다.
(다) 처음 삼남 지방은 정해진 결수로 조세 대장에 기록하
되… 나머지 5도는 모두 하지하(下之下)로 정하여 징
수하였다. 이후 경기, 삼남, 해서, 관동 모두 1결에서
4두를 징수하였다.
↳ 15.경찰1차/
(가)과전법 (나)세종 때 공법 (다)인조 때 영정법
모든 토지는 6등급으로 나누었다. 20년마다 토지를 다시 측량하여 양안을 만들어 호조와 해당 도, 고을에 갖추어 둔다. 1등전의 척(尺)은 주척으로 4척 7촌 7분이며, 6등전의 척은 9척 5촌 5분이다. … 항상 경작하는 토지를 정전(正田)이라 하고, 경작하다 때로 휴경하는 토지를 속전(續田)이라 부른다. 정전으로 기록되었더라도 토질이 좋지 못하여 곡식이 잘 되지 않는 토지라든지, 속전으로 기록되어도 토질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은 경우에는 수령이 이를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다음에 개정한다. -경국대전
↳ 11.지방7
전품에 따라 척(尺)을 달리하는 수등이척법
수등이척법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경작지를 6등급으로 구분한 전세제도는 세종 때의 공법이다.
근래 흉년이 해마다 더욱 심해진데다가 변경의 일까지 생겨 마구 쓰는 것이 수백 가지여서 국고가 고갈되었습니다. 관원을 줄이고 녹봉을 감하여 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관리들의 직전까지도 부득이 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 16.기상9
명종 때 직전법 폐지 / 이로써 수조권을 지급하는 제도가 없어졌고 관리에게는 녹봉만이 지급되었다.
- 16세기에는 지주 전호제가 확대되는 가운데 방납의 폐단이 나타나고 군포 징수제가 확대되었으며 환곡의 고리대화로 농민이 유망하고 도적이 증가하였다. 임꺽정이 이 시기 활동한 대표적인 도적이다.
각 도의 수전(水田), 한전(旱田)의 소출 다소를 자세히 알 수가 없으니, 공법에서의 수세액을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부터는 전척(田尺)으로 측량한 매 1결에 대하여 상상(上上)의 수전에는 몇 석을 파종하고 한전에서는 무슨 곡종 몇 두를 파종하여, 상상년에는 수전을 몇 석, 한전은 몇 두를 수확하며, 하하년에는 수전은 몇 석, 한전은 몇 석을 수확하는지, … 각 관의 관둔전에서도 과거 5년간의 파종 및 수확의 다소를 위와 같이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합니다.
↳ 11.국가9
제시문의 수취 제도가 만들어질 당시의 농업 특징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공법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 전기
호조에서 아뢰기를 [ ㄱ ]은/는 진제(賑濟)와 환상(還上)을 위해 설치한 것이고, 국고는 군국의 수요에 대비한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러 번 흉년이 들어 백성의 생활이 오로지 진제와 환상만 바라고 있으니, 이 때문에 [ㄱ]이/가 넉넉하지 못하므로 부득이 국고로 지급하여 구휼하게 되어 군수가 점차로 거의 없어지게 되니 진실로 염려할 만한 일입니다. -세종실록
↳ 16.사복9
[ ㄱ ]은? 의창
- 진제: 흉년을 당한 가난한 백성을 도와줌
환상: 백성에게 곡식을 꾸어 주고 가을에 받아들임
- 고려 시대에 처음 설치되어 조선 초기까지 의창을 유지
했지만 원곡이 부족해지자 16세기에는 상평창이 환곡
을 담당하며 1/10을 이자로 받았다
임인년(1542)에 주세붕 공이 풍기 군수가 되어 묘우(廟宇)를 창건하였다. 다음 해 8월 문성공 안유의 영정을 봉안하고, 갑진년(1544)에 문정공 안축과 문경공 안보를 배향하였다. 건물과 제도는 주자가 백록동에 세운 선례를 따랐다. 우리나라의 [ ㄱ]이/가 여기서 처음 시작되었다.
↳ 15.교행
[ ㄱ ]은? 서원
무릇 교육이란 현인(賢人)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된다.… 지금의 죽계(풍기)는 문성공(안향)이 살았던 마을이다. 교육을 하려면 반드시 문성공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 이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사묘(祠廟)를 세우고 서원을 설립하였다. -무릉잡고
↳ 3.0보충자료
<무릉잡고>는 주세붕의 시문집으로, 백운동 서원의 설립을 보여주는 사료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옛날에는 종법이 있어 대수(代數)의 차례가 잡히고, 적자와 서자의 자손이 구별 지어져 영원히 알 수 있었다.종법이 없어지고는 족보가 생겨났는데, 무릇 족보를 만듦에 있어서 반드시 그 근본을 거슬러 어디서부터 나왔는가를 따지고,그 이유를 자세히 적어 그 계통을 밝히고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구별하게 된다.
↳ 09.지방7
<안동 권씨 성화보>의 일부
-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 조선 성종
때 간행되었다.→ 조선 전기
- 이를 통해 향촌 자치를 구현하고 일반 농민에 대한 통
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X)→ 보학은 주로 양반 가문
내부의 결속 또는 다른 가문과의 관계 등을 구별하기 위
해 간행된 것으로 농민에 대한 통제와는 직접적인 관련
이 적은 편이다. 해당 지문은 ‘향약’에 대한 설명이다.
교육 내용은 강독, 제술, 습자 세 가지였다. 교재는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사서삼경이 중심이었고, 부교재로는 <사기>, 당송문 등이 있었으나, 보통은 <통감>정도에 그쳤다. 교육 방법으로는 이미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그 뜻을 질의 응답하는 방법인 ‘강(講)’으로, 암송 낭독하는 배강(背講)과 책을 보고하는 면강(面講)이 있다.
↳ 10.경북교행
다음의 교육 기관은? 서당
- 4부 학당이나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나 평민의 자제를 대상으로 하던 초등 교육 담당의 사립 교육 기관
일찍이 세조께서, “우리 동방에는 비록 여러 역사서가 있으나 장편으로 되어 귀감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시고, 관리들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셨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주상께서 그 뜻을 이어받아 서거정 등에게 편찬을 명하였습니다. … 이 책을 지음에 명분과 인륜을 중시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난신을 성토하고 간사한 자를 비난하는 것을 더욱 엄격히 하였습니다.
↳ 14.경찰1차
서거정 <동국통감>, 성종
-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
- 문종 때 김종서 등이 <고려사>를 간추려 만든 <고려사
절요>와 성종 때 고조선 이래에서 삼국 멸망까지를 다
룬 <삼국사절요>를 합하여 편찬한 것이다.
삼국이 병립하였을 때는 삼국기, 신라가 통일하였을 때는 신라기, 고려 때는 고려기라 하였고, 삼한 이상은 외기(外記)라 하고는 1400년 동안 국세의 이합과 국운의 장단과 임금의 잘잘못과 정치의 성쇄를 서술하였습니다. 명교를 중히 여기고 절의를 숭상하며, 난신적자는 주벌하는 것에 있어서는 더욱 근엄하게 하였습니다.
↳
서거정 <동국통감>, 성종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천변과 지괴를 정사(正史)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전례에 의하여 다시 첨가하여 기록하지 말고, 또 그 군왕의 시호는 아울러 실록에 의하여 태조 신성왕, 혜종 의공왕이라 하고, 묘호와 시호도 그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이며, 그 태후, 태자와 관제(官制)도 또한 모름지기 고치지 말고, 오직 대사천하(大赦天下)라고 한 곳에는 천하 두 글자만 고칠 것이요, 또한 천하를 경내로 고칠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5년
↳ 08.법원9
김종서, 정인지 <고려사>, 문종
- ‘종, 태자, 태후’ 칭호→ 고려 역사를 자주적으로 정리
- 본기 없음, 세가-지-연표-열전→ 기전체
우왕(신우)과 창왕(신창)은 열전에 기록→ 명분론 반영
- 정도전의 <고려국사>를 모델로 편찬
세가 46권, 지 39권, 연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중 총 139권으로 되어있다. 왕기는 세가라 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우왕, 창왕을 거짓 왕조로 규정하여 열전에 강등하였다.
↳
<고려사>, 문종
세조께서 옥쇄를 쥐고 나라를 중흥시키시니, 창업과 수성을 겸비하신 것이다. 일찍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의 심후하신 인덕과 크고 아름다운 규범이 훌륭한 전장에 퍼졌으니,… 또 여러 번 내린 교지가 있어 법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리석고 둔한 관리들이 법을 만들어 시행함에 어두웠던 것은 진실로 그 목차와 조문이 너무 번잡하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손익을 헤아리고 회통할 것을 산정하여 만대 성법을 만들고자 한다.
- 서거정이 <이 책>을 올리면서 쓴 서문
↳ 15.국회9
<이 책>은? <경국대전>
- 세조 때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편찬을 시작하였다.
천지가 광대하여 만물이 덮여 있고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사시의 운행으로 만물이 생육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성인이 제도를 만드심에 만물이 기쁘게 보이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성인이 제도를 만드심은 천지, 사시와 같은 것이다.
↳ 14.사복9
<경국대전> 서문의 일부
물론 단군께서 제일 먼저 나시기는 하였으나 문헌으로 상고할 수 없다. 삼가 생각하건대 기자께서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그 백성을 후하게 양육하고 힘써 가르쳐 주어 머리를 틀어 얹는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켜, 문화가 융성하였던 제나라와 노나라와 같은 나라로 만들어 주셨다.
↳ 10.지방7
이이 <기자실기>
- 이이는 조선이 기자 조선 때 이미 제나라나 노나라와
같은 중화 문명을 받아들여 유학이 토착화되었음을 강조
하여 사림이 추구하는 유학적 통치, 즉 왕도 정치의 기
원이 오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Q. 이 사서의 역사 인식은? 조선 중기 사림의 존화주의
A. 사림들이 추구하는 왕도 정치에 대한 뿌리 찾기의 시도
를 보여주었다.
왕의 명으로 이 책을 완성하였다. 그 내용은 제사에 대한 길례(吉禮), 왕실의 관례와 혼례에 대한 가례(嘉禮), 사신 접대에 대한 빈례(賓禮), 군사 의식에 대한 군례(軍禮), 상례 의식에 대한 흉례(凶禮)이다.
↳ 13.경찰2차
<국조오례의>, 성종
후세의 임금들은 천명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른 만큼 그 책임이 지극히 무겁고 지극히 크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도구는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라옵건대 밝으신 임금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깊이 살피시어, 먼저 뜻을 세워 “노력하면 나도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십시오.
↳ 15.법원9
이황 <성학십도>
제왕의 학문은 기질을 바꾸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치는 정성을 다해 어진 이를 등용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질을 바꾸는 데는 병을 살펴 약을 쓰는 것이 효과를 거두고, 어진 이를 쓰는 데는 상하가 틈이 없는 것이 성과를 얻습니다.
↳ 15.법원9
이이 <성학집요>
- 이황의 성학십도, 이이의 성학집요는 두 학자가 선조에게 올린 일종의 제왕학으로, 이황은 군주 스스로 성찰을 통해 성현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보았고, 이이는 군주의 성품이 성현에 못 미치더라도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이를 보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理)와 기(氣)는 논리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 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불리(不離)의 관계에 있다.… 일물(一物)이 아닌 까닭에 일이면서 이요,이물(異物)이 아닌 까닭에 이이면서 일이다.
↳ 08.국가9
이이 ‘일원론적 이기이원론’
- 관념적 도덕 세계와 경험적 현실 세계를 함께 존중하는
철학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황은 이원론적 이기이원론)
대저 정치하는 요령은 그 강이 하나 있고 그 목이 10개가 있습니다. 강이란 것은 체이니 정치를 하는 본령이오, 목이란 것은 용이니 정치를 마련하는 법입니다.… 일강이란 무엇을 이름인가. 군주의 마음가짐입니다. 서정의 번잡함과 만민의 수효가 많음도 치란휴척의 기틀은 군주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서 임금의 마음가짐을 바로잡는 요령도 반드시 학문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을 알 것입니다.
↳ 07.국가7
이언적 <일강십목소>, 중종
- 성패가 군주의 마음씀에 달려 있으므로 제왕이 성학을
이루어야 한다는 성학군주론으로 연결되었다.
- 16세기 중엽 이황, 이이도 이러한 경향에서 나타난 성
학 군주론의 두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 우리 동방의 문(文)은 송과 원의 문도 아니고 한과 당의 문도 아니며 바로 우리나라의 문입니다. 마땅히 중국 역대의 문과 나란히 천지의 사이에 행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 동방의 문은 삼국시대에서 비롯하여 고려에서 번성하였고 아조(我朝)에 와서 극(極)에 이르렀습니다. 천지 기운의 성쇠와 관계된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 전하께서는… 신 서거정 등에게 명해 제가의 작품을 뽑아 한질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전하의 위촉을 받아 삼국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辭), 부(賦), 시(時), 문(文) 등 여러 문체를 수집하여 이 중 문장과 이치가 순정하여 교화에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고 분류하여 130권을 편찬해 올립니다.
↳ 14.지방7 //12.지방9
서거정 <동문선>. 성종
- 우리나라의 역대 시문 중에서 뛰어난 작품 133편을 모
은 문집
세종 때 정치에 모범이 될 만한 일들을 모아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해 권제와 정인지 등에게 명해 편찬하도록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뒤 세조가 이를 계승해 1457년(세조 3)에 신숙주와 권람 등에게 명해 처음으로 완성하였다.
↳ 3.0반쪽모고
<국조보감>
유효통, 노중례 등이 왕명을 받아 [ ㄱ ]을 편찬하였다. 이 서적은 우리나라 고유의 의학 서적 10종과 중국 역대 의학 서적을 합하여 160여 종 의학 서적의 처방을 인용하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나는 700여 종의 한국산 의약을 소개하고 있다. 또 모든 질병을 내과, 전염병, 외과, 이비인후과, 안과, 산부인과, 소아과, 치과 등 57병문으로 나누어 이에 대한 처방과 출전을 함께 서술하였다.
↳ 3.0반쪽모고
[ ㄱ ]은? <향약집성방>
외방 곳곳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다.… 나는 청하기를 “당속미 1천석을 군량으로 하되, 한 사람당 하루에 2승씩 급료를 준다면 사방에서 군인으로 응하는 자가 모여들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얼마 안 되어 수천 명을 얻어 조총 쏘는 법과 창, 칼 쓰는 기술을 가르치고, 초관과 파총을 세워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또 당번을 정하여 궁중을 숙직하게 하고, 국왕의 행차가 있을 떼에 이들로써 호위하게 하니 민심이 점차 안정되었다. - 서애집
↳ 12.국가7
훈련도감
-이 군인들은 면포와 수공업 제품의 판매를 통해 난전에 가담하였다.
-임진왜란 중 전래된 명나라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포수(조총 대비),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구성되었다.
* 잡색군은 군역을 지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 (노비/ 학생/ 서리 등등으로)
속오군 (양반부터 노비까지 모두)
적이 청주성을 함락시키니, 절도사 이봉상과 토포사 남연년이 죽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 등이 양성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 이인좌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兵機)를 실어다 고을 성 앞 숲 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인좌가 자칭 대원수라 위서(僞書)하여 적당 권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박종원을 영장으로 삼고, 열읍(列邑)에 흉격(凶檄)을 전해 병마(兵馬)를 불러 모았다. 영부(營府)의 재물과 곡식을 흩어 호궤(犒饋)하고 그의 도당 및 병민(兵民)으로 협종(脅從)한 자에게 상을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년
↳ 13. 서울9
-소론인 이인좌가 난을 일으킨 이후, 영조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정책에 무조건 찬성하는 완론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치를 운영하였다
충청도에서 정부군과 반란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며, 전라도에서도 반군이 조직되었다. 반란에 참가한 주동자들은 비록 정쟁에 패하고 관직에서 소외되었지만, 서울과 지방의 명문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다. 반군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안성과 죽산으로 향하였다.
↳ 09.국가9
이인좌의 난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하면서 일으켰다.
-소론 및 남인 강경파가 주동이 되어 일으켰다.
이 책이 완성되었다.… 곤봉 등 6가지 기예는 척계광의 <기효신서>에서 나왔는데… 장헌세자가 정사를 대리하던 중 기묘년에 명하여 죽장창 등 12가지 기예를 더 넣어 도해로 엮어 새로 신보를 만들었고, 상(上)이 즉위하자 명하여 기창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 마상재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가 되었는데,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에게 명하여… 주해를 붙이게 했다.
↳ 12.지방9
Q. 상(上)의 재위 시에 있었던 일은?
A. 민(民)의 상언과 격쟁의 기회를 늘려주었다.
- 제시된 사료는 <무예도보통지>, 정조
-정조 때 자주 화성을 행차하면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백성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기본적으로 식년시는 정기 시험이고
알성시/증광시는 부정기 시험인 것은 아시겠죠?
3년마다 실시 된 식년시는 외우기 쉽습니다.
증광시는 나라에 열광할 만한 특별 행사가 있을 때 실시합니다.
알성시는 왕이 성균관 문묘 참배 후 유생들의 취업 알선을 위해 실시합니다.
정조 18년 1월부터 정조 20년 8월에 걸친 성곽의 축조는 큰 도목 건축 공사로서 많은 경비와 기술이 필요하였으므로, 그 공사 내용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겨야 하겠다는 뜻에서 정조가 편찬을 명령, 1796년 9월에 시작하여 그 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이어 순조 1년 9월에 발간되었다.
↳ 08.지방7
<화성성역의궤>
-위의 자료는 <화성일기>에 관한 설명이다. (X)→ <화성일기>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일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행차를 수행한 이희평이 지은 기행 일기다.
-정교한 활자와 높은 수준의 인쇄술을 보여준다. (O)
보잘것없는 나, 소자가 어린 나이로 어렵고 큰 유업을 계승하여 지금 1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덕이 부족하여 위로는 천명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민심에 답하지 못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잊지 못하고 근심하며 두렵게 여기면서 혹시라도 선대왕께서 물려주신 소중한 유업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지난번 가산(嘉山)의 토적(土賊)이 변란을 일으켜 청천강 이북의 수많은 생령이 도탄에 빠지고 어육(魚肉)이 되었으니 나의 죄이다.
↳ 14.국가9
1811년 순조, 홍경래의 난
-서북 지역에 대한 차별 대우와 세도 정치에 불만을 품고 가산에서 가난한 농민, 중소 상공업자, 광산 노동자 등과 합세하여 난을 일으켰다. 한때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에서 패배하면서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니 관서의 부로(父老)와 자제와 공·사 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라. 무릇 관서는 성인 기자의 옛 터요 단군 시조의 옛 근거지로서 의관(衣冠 : 유교 문화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뚜렷하고 문물이 아울러 발달한 곳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관서를 버림이 분토(糞土)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의 노비들도 서로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한(平漢, 평안도 놈)”이라 말한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는 자 있겠는가.··· 지금 임금이 나이가 어려 권세 있는 간신배가 그 세를 날로 떨치고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오로지 갖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고을의 군후(君侯)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동요하지 않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남김없이 밟아 무찌르리니, 마땅히 속히 명을 받들어 거행함이 가하리라.
↳
홍경래의 격문
제가 장단 적소에 있을 때 면포 상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길가는 사람들이 [ ㄱ ]의 효과라 하였습니다. 작년 겨울 서울의 면포 가격이 이 때문에 등귀하지 않아 서울 사람들이 생업을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16.기상7/ 14.사복9/ 09.지방7
정조 1791년 시행된 통공 정책에 대한 채제공의 평가
이들은 본시 모두 사대부였는데 또는 의료직에 들어가고 또는 통역에 들어가 그 역할을 7~8대나 10여 대로 전하니 사람들이 서울 중촌(中村)의 오래된 집안이라고 불렀다. 문장과 대대로 쌓아 내려오는 미덕은 비록 사대부에 비길 수 없으나 유명한 재상, 지체 높고 번창한 집안 외에 이들보다 나은 자는 없다. 비록 나라의 법전에 금지한 바 없으나 자연히 명예롭고 좋은 관직으로의 진출은 막히거나 걸려 수백 년 원한이 쌓여 펴지 못한 한이 있고 이를 호소할 기약조차 없으니 이는 무슨 죄악이며 무슨 업보인가?
↳ 15.국가9/ 12.지방9/
‘이들’은? 중인
- 집단으로 상소하여 청요직 허통을 요구하였다. (O)
- 조선 후기에는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문예 활동을
하였다. (O)
- 연합 상소 운동이 성공하여 명예롭고 좋은 관직(청요직)
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X)
- 서얼은 청요직에 진출하게 해달라는 통청 운동을 벌여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
나 기술직 중인의 소청 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오늘날 사설(邪說)의 폐단을 바로 잡는 길은 더욱 정학(正學)을 밝히는 길밖에 없다. … 연전에 서학(西學) 서적을 구입해 온 이승훈은 어떤 속셈이든지 간에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전 현감 이승훈을 예산현으로 귀양을 보내고, 이외 시골 백성에게도 상줄 만한 백성은 상 주어야 할 관서가 있어야 하니 묘당(廟堂)에서는 소관 관서를 철저히 감독하라. … 이렇게 교시한 뒤에도 다시 서학(西學)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찌 정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척사학교
↳ 13.국가7
다음 교서가 발표된 시기는? 정조
* 정조 (1777)정유절목- 서얼차별완화, 규장각 검서관 등용
(1785)을사추조적발 사건- 천주교 집회 적발
(1791)신해통공- 육의전 제외 금난전권 폐지
신해박해- 권상연, 윤지충 母 신주 <진산사건>
이승훈 투옥
삼국사에서 신라를 으뜸으로 한 것은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했고, 뒤에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였으며, 또 고려는 신라를 계승하였으므로 편찬한 것이 모두 신라의 남은 문적(文籍)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 고구려의 강대하고 현저함은 백제에 비할 바가 아니며, 신라가 차지한 땅은 남쪽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김씨는 신라사에 쓰여진 고구려 땅을 근거로 했을 뿐이다.
↳ 15.지방9
안정복 <동사강목>
- 우리 역사의 독자적 정통론을 세워 이를 체계화하였다.
-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이라며 이를 비판하고 고구려의
강대함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대저 살 곳을 잡는 데는 첫째 지리(地理)를 첫째로 들 수 있으며, 생리(生利)가 다음이다. 그 다음은 인심(人心)이며, 또 다음은 아름다운 산수(山水)가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에 하나라도 모자라면 살기 좋은 땅이 아니다. 그런데 지리가 비록 좋아도 생리가 모자라면 오래 살 곳이 못되고, 생리가 비록 좋아도 지리가 나쁘면 또한 오래 살 곳이 못된다. 지리와 생리가 함께 좋아도 인심이 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일이 있게 되고, 가까운 곳에 볼 만한 산수가 없으면 성품을 닦을 수 없다.
↳ 10. 정보통신순경
이 책의 저자와 서명은? 이중환 <택리지>, 영조
- 우리나라의 최초의 인문 지리서로 여기서는 우리나라
각 지방의 자연환경과 인물, 풍속, 물산, 인심의 특색 등
을 세밀하게 서술하고 어느 지역이 살기 좋은 곳(가거
지)인지를 논하였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고구려)가 망한 다음 김씨(신라)가 남방을 차지하고 대씨(발해)가 북방을 차지하고는 발해라 하였으니,이것을 남북국이라 한다. 당연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저 대씨가 어떤 사람인가?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땅은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 09.국가9
유득공 <발해고>
이항(里巷)인들은 일컬을 만한 경학이나 내세울 만한 공훈도 없다.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기록할 만한 시나 문장을 남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 슬프다. 내가 여러 문집에 있는 사람은 찾아내고, 기록되지 아니한 사람은 직접 써서 이 책을 간행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 15.경찰3차
김천택 <청구영언>, 영조
- ‘청구’는 우리나라, ‘영언’은 노래를 뜻하며, 입으로 전해지던 시조와 가사 580수가 수록되어있다. ‘이항인’이란 거리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중인’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 중인의 학식이 높아졌음에도 정치적 제약이 있어 시사 등을 조직해 문예 활동에 힘썼던 것을 반영하여 중인의 시가도 다수 실려 있다.
* 농부 한 삶이 토지 1경을 받아 법에 따라 조세를 낸다. 사대부로서 처음 학교에 입학한 자는 2경을 받는다. 내사에 들어간 사람은 4경을 받고 병역을 면제한다. 현직 관료는 … 9품에서 2품까지 조금씩 차등을 두어 지급한다.
토지제도를 바로 잡지 않으면 백성의 생활은 영원히 안정될 수 없다.… 그런데 부자들은 한없이 넓은 토지가 서로 맞대어 있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는 지경이 되었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 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 지게 되었다.
↳
유형원 <반계수록>
균전론: 관리, 선비, 농민 등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토지 재분배
* 국가는 마땅히 일가의 생활에 맞추어 한전(限田)의 농토 몇 부를 한 가구의 영업전으로 만들어 주어, … 영업전은 법으로 매매를 금지한다.
↳
이익 <곽우록>
국가제도 전반에 대한 개혁 제시, 한전론 주장
*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생긴다. 이해관계가 오래될수록 붕당이 견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형세이다.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대개 과거 제도가 번잡하여 인재를 너무 많이 뽑으면 애증에 치우쳐 진퇴가 일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이익 <성호집> ‘붕당론’
양반수, 특권 제한 주장. 성호 학파 형성
* 농사를 힘쓰지 않는 자 중에 그 좀이 여섯 종류가 있는데, 장사꾼은 그 중에 들어가지 않는다. 첫째가 노비요, 둘째가 과거요, 셋째가 벌열이요, 넷째가 기교요, 다섯째가 승니요, 여섯째가 게으름뱅이들이다. 저 장사꾼은 본래 사민(四民)의 하나로서 그래도 통화의 이익을 가져온다. 소금, 철물, 포백 같은 종류는 장사가 아니면 운반할 수 없지만, 여섯 종류의 해로움은 도둑보다도 더한다.
↳ 10.국가7
이익 ‘6두론’(6좀론)(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
* 하늘이 날짐승과 길짐승에게는 발톱과 뿔을 주고 단단한 발굽과 예리한 이빨을 주었으며 여러 가지 독(毒)을 주어서, 각기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얻게 하고 외부로부터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게 하였는데, 사람에게는 벌거숭이로 유약(柔弱)하여 제 생명을 보호하지 못할 듯이 하였으니, 어찌하여 하늘은 천하게 하여야 할 금수(禽獸)에게는 후하게 하고, 귀하게 하여야 할 인간에게는 박하게 하였는가. 이는 인간에게는 지혜로운 생각과 교묘한 연구력이 있으므로 기예(技藝)를 익혀서 제 힘으로 살아가도록 한 것이다.
… 온갖 공장이의 기술이 정교해지면 궁실(宮室)과 기용(器用)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성곽과 선박, 수레, 가마 따위의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고 견고(堅固)하게 될 것이다.
↳
정약용 <기예론>
* 대저 천자란 어찌하여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늘에서 비 내리듯 내려와서 천자가 되었는가, 아니면 땅 속에서 샘솟듯 솟아나서 천자가 되었는가? 다섯 가구가 一隣이 되므로 다섯 가구에서 추대된 사람이 隣長이 되고, 다섯 隣이 1里가 되므로 다섯 隣에서 추대된 사람이 里長이 되고, 다섯 鄙(비)가 1縣이 되므로 다섯 鄙에서 추대된 사람이 縣長이 된다. 여러 縣長의 공동 추대를 받은 사람이 제후가 되고, 제후들이 공동으로 추대한 사람이 곧 천자이다. 그러므로 천자란 군중의 추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
정약용 <탕론>
민본적 역성혁명 옹호
* 그들의 권농은 사람을 경사스럽게 만들기 충분하며 그들의 형률과 위엄은 사람을 겁주기에 충분하다. 그리하여 거만하게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태연히 제 혼자 좋아서 자신이 목민자임을 잊어버리고 있다. 한 사람이 다투다가 찾아가 판정해 달라고 하면 불쾌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어찌 이렇게 시끄럽게 구느냐?”라고 하고, … 곡식이나 옷감을 바치지 아니 하면 매질이나 몽둥이질을 하여 피가 흘러서야 그친다. 날마다 문서 장부에다 고쳐 쓰고 덧붙여 써서 돈과 베를 거두어 들여 그것으로 밭과 집을 장만한다. 또한 권귀와 재상에게 뇌물을 써서 훗날의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어디 이치에 합당하겠는가? 목민자는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 15.지방7
정약용은 <원목> (목민심서 아님) (목민자는 백성을 기르는 사람)
Q. 다음 주장을 한 인물의 저술은?
A. <마과회통>은 정약용이 마진(홍역)의 치료에 관하여 저
술한 책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마진과 관계된 약방을
총망라해 종합한 의서이다.
* 무릇 1여(閭)의 토지는 여민이 함께 농사하고 경계를 나누지 않는다. 여장은 매일 개개인의 노동량을 장부에 기록하여 두었다가 가을이 되면 수확물을 여장의 집에 가져온 다음에 분배한다. 이때 국가에 바칠 세와 여장의 봉급을 제하며, 그 나머지를 가지고 노동 일수에 따라 여민(閭民)에게 분배하도록 한다.
↳ 15.국가7/ 12.지방7/
정약용 <전론>中 ‘여전론’
-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고 실험하였다.
- 당시 토지 개혁론으로 균전론(유형원), 한전론(이익) 등
이 제시되었으나, 정약용은 이것이 시행상의 한계가 있
다고 비판하면서 여전론을 제시하였다.
- 여전제의 토지 제도를 군사 조직의 근간으로 삼아 병농
일치의 군제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 초기에 주나라 때의 농업과 맞지 않아 정전론 시행에
어려움을 들면서 여전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여전론의
이상적 성격을 깨닫고 정전론을 주장하였다.
- 놀고먹는 양반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겨있다.
이 밖에도 허다한 고질적인 폐단이 모두 양반을 우대한다는 헛된 명분에서 나오고 있으니, 그 근본을 따져보면 국초에 법제를 마련할 때 사민(四民)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백성들은 일정한 직업이 없고, 생활의 곤궁함이 이미 극도에 달하고 있으니…
↳①선비(☞士), 농부(☞農), 장인바치(匠人-)(☞工), 장사치 = 사민
유형원 <우서>
대체로 재물은 비유하건대 샘과 같은 것이다. 퍼내면 차고, 버려두면 말라 버린다. 비단옷을 입지 않아서 나라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면 여성들의 기술이 쇠퇴하고, 쭈그러진 그릇을 싫어하지 않고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나라의 수공업자들이 기술을 열심히 익히는 일이 없게 되면 기예가 망하게 된다.
↳ 16.계리9/
박제가 <북학의>中
-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샘(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
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우리나라는 본래부터 명분을 중히 여겼다. 양반은 아무리 심한 곤란과 굶주림을 받더라도 팔짱끼고 편하게 앉아 농사를 짓지 않는다. 간혹 실업에 힘써서 몸소 천한 일을 달갑게 여기는 자기 있으면, 모두들 나무라고 비웃기를 종처럼 무시하니, 자연히 노는 백성은 많아지고 생산하는 자는 줄어든다. 재물이 어찌 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목 별로 조항을 엄격히 세워야 마땅할 것이다. 그 중에서 사농공상에 관계없이 놀고먹는 자는 관에서 벌칙을 마련하여 세상에 용납할 수 없게 해야 한다.
↳ 17.경간
홍대용 <담헌서>中 ‘임하경륜’
성인 남성에게 토지 2결을 지급하는 균전제 실시, 양반들도 생산 활동에 종사해야 하며, 기술의 혁신과 문벌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임을 강조
* 천체가 운행하는 것이나 지구가 자전하는 것은 그 세가 동일하니,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다만, 9만 리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이처럼 빠르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는 겨우 반경(半徑)밖에 되지 않는데도 몇 천 만억의 별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물며 천체들이 서로 의존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이루고 있는 우주 공간의 세계 밖에도 또 다른 별들이 있다. … 칠정(七政)이 수레바퀴처럼 자전함과 동시에, 맷돌을 돌리는 나귀처럼 둘러싸고 있다. 지구에서 가까이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해와 달이라 하고, 지구에서 멀어 작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은 오성(五星)이라 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동일하다.
↳ 10.법원9/ 6회 한능검/
* 대저 땅덩어리는 하루 동안 한 바퀴를 도는데. 땅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이다. 9만 리 넓은 둘레를 12시간에 도니 천둥, 번개나 포탄보다 더 빠른 셈이다. … 서양 어떤 지역은 지혜와 기술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측량에 있어서 해박하고 자세하니, 지구가 둥글다는 설은 다시 의심할 여지도 없다.
* 중국은 서양과 180도 경도 차이가 있다. 중국인은 중국을 중심으로 삼고 서양을 변두리로 삼으며, 서양인은 서양을 중심으로 삼고 중국을 변두리로 삼는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사람은 땅에 따라서 모두 그러한 것이니 중심도 변두리도 없이 모두가 중심인 것이다.
홍대용 <담헌서> ‘의산문답’ (실옹과 허자의 문답형식)
- 김석문, 최한기와 같이 지전설을 주장하여 성리학적 세
계관을 비판하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 무한우주론을 근거로 화이의 구분을 부정하였다.
-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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