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경 한국사

 

서옥제 - 고구려 (여자의 집에서 자기들이 살고 ~)


고구려 -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 거느리고 있었다.


진한과 변한에서는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깃을 함께 묻어 죽은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기원


백제는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의 재물을 횡령했을 때에는 3배를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했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까지 충도(忠道)를 지키고 잘못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을 맹세한다. (임신서기석) - 신라


신이 숙위원(宿衛院)의 보고를 보았더니, 왕자 대봉예가 글을 올려 발해를 통일신라보다 윗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주청하였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 897 쟁장사건 


신라는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경주)에 와서 거주하게 하는 상수리 제도를 실시


대공의 난 - 768년 혜공왕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인 태후의 섭정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로 인해 왕권이 불안정하고 대공의 난을 시작으로 수많은 진골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김헌창의 난 - 822년 헌덕왕

장보고의 난 - 846년

원종 애노의 난 - 889년 진성여왕


대광현 항복 - 고려 태조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 하였다.)


왕규의 난은 왕규가 왕위쟁탈을 위해 일으킨 난으로, 고려 혜종 때(945, 혜종 2) 일어났다


귀법사는 고려 광종 대에 창건되었다.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


경대승 - 도방 조직 (사병집단)


최충헌은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정치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인 교정별감이 되어 최고의 권력을 행사했다.


몽골의 1차 침입(1231, 고종) 당시 박서가 귀주성에서 활약하였다

-> 최우는 몽골에 대항하여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 몽골의 2차 침입 때(1232)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자 몽골군이 퇴각하였다.

-> 대장도감은 1236년 강화도에 설치되었다.



조선 - 조례, 나장, 일수 등은 상민에 속하였다. 

(수군, 조례 등은 신량역천(칠반천역)으로, 상민(양인) 신분

이지만 사람들이 꺼리는 천역(賤役)에 종사했다. )


조선 - 공노비에게 유외잡직이라는 벼슬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 공노비의 경우 상의원·사복시·군기시 등의 관서에서 요리사, 바느질, 말 기르기, 무기 제작,   건물 수리 등을 맡는 유외잡직(流外雜織)이라 불리는 하급기술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조선 - 과거 외에도 음서나 천거(고관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 등을 통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조선 - 서얼 차대법은 태종 때 제정되었다.



한산도 대첩에 대한 내용으로 이 전투는 1592년 7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왜의 수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 1592년 10월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맞아 진주성에서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관군이 싸워 승리하였으나 김시민은 전사하였다

-> 1593년 1월 조선과 명나라가 연합한 조⋅명 연합군이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와가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 1593년 2월의 사건이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진하다가 벽제관에서 패퇴하고 명군이 평양성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권율의 부대는 행주산성에서 왜군에 포위되었다. 그러나 권율을 중심으로 한 관군과 백성들은 9차례에 걸친 왜군의 공격을 모두 물리쳤다.



1차 진주성 - 김시민O (전사)

2차 진주성 - 김시민X


화이론 -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

화이론은 북벌론과 관계 있음


창덕궁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한 것이나 송시열이 만동묘(萬東廟)를 설치한 것 등은 이러한 의식의 소산(화이론)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1649~ 1659)은 서인인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북벌론은 병자호란의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문종 - 편년체 고려사절요 (1452) 편찬

성종 - 강력한 억불책으로 도첩제마저도 폐지하고 출가 금지

태종 - 주자소 설치, 구리로 계미자 주조

중종 -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은 명종때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고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엇다.





박제가 - 우물론(소비 권장), 규장각 검서관 활동


한전론 - 이익, 박지원(박제가X)



임오군란의 결과로 체결된 제물포 조약(1882)

- 일본 공사관에 약간의 군사를 두어 경비하게 한다



한성 조약 체결 

- 일본은 자신들도 정변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

선이 국서로서 사죄를 표명할 것과 일본 공사관 신축비와 

배상금 지불 등을 내용으로 함 (2만원)



통리기무아문 - 임오군란때 흥선이 폐지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은 마젠창과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 및 외교에 간섭


대한제국은 1902년 수민원을 설치하여 외국여행권, 이민 업무 등을 관장하게 하였다.


 중추원은 황제가 임명한 25인과 독립 협회가 

선출한 25인으로 구성되며, 법률과 칙령, 의정부 의결, 국민의 

건의 사항 등을 심사·의결하는 권한을 가졌다.


제1차 갑오개혁 때 경무청이라는 경찰기구를 설치하였다.


지방 재판소와 고등 재판소를 개설한 것은 제2차 갑오개혁 때의 사실이다. 



제1조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하여 대한 정부에 용빙하고, 재무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 의견을 물어 시행할 것.

- 1904년 8월에 체결된 제1차 한·일 협약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할 것.

-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의 내용


한·일 신협약을 실행하기 위해 작성된 비밀 각서(부수 각서)에 따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


1903년 러시아는 한국의 용암포를 강제 점령하고 조차를 요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은 더욱 격화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6년으로 했다 - 1922년에 제정된 제2차 조선 교육령

(1922~1938)


일제는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세워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고등 교육 수요를 충족하고, 한국인의 고등 교육에 대한 열기와 불만을 잠재우려고 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인사들은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 선 혁명당을 해체한 후 통합된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였다(1940. 5.). 한국 독립당은 실질적인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여당 역할을 하며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 


한국광복군 선언 - 194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선포한 것은 1941년


한국 광복군에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가 합류한 것은 1942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4년 5차 개헌에서 주석·부주석제를 채택하였다(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안재홍 - 조선상고사삼,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1945년 8월에 결성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는 위원장에 여운형(중도 좌파), 부위원장을 안재홍(중도 우파)으로 하는 좌우 합작으로 결성되었다


 송진우, 김성수 등 일부 우익 인사들은 1945년 9월 한국 민주당(한민당)을 창당

 

1945년 10월에 결성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된 인물은 이승만





장면 내각의 시정 방침 - 부정 선거의 원흉과 발포 책임자, 부정·불법 축재자 처벌 등의 내용



 화폐 개혁이 단행된 것은 5·16 군사 정변(1961)으로 장면 내각이 9개월 만에 붕괴되고 난 후인 박정희 군정시기의 일


잡지 『사상계』는 이승만 정부 때인 1953년 장준하를 발행인으로 창간되었던 월간 종합 잡지이다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부 때인 

1968년 11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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